[시선뉴스 이호 / 디자인 이연선]

▶ 제임스 조지프 브라운 주니어(James Joseph Brown, Jr.)
▶ 출생-사망 / 1933년 5월 3일 ~ 2006년 12월 25일
▶ 국적 / 미국
▶ 활동분야 / 대중음악, 영화

소울이라는 음악 장르를 완성하고 R&B 유행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펑크 뮤직을 개척한 미국 흑인 음악계의 영원한 대부

- 음악 천재 탄생하다
제임스 브라운은 1933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나 1944년 11살의 나이에 조지아주 레녹스 시어터(Lenox Theater)에서 열린 음악 경연 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천재의 탄생을 알렸다.

- 그룹 활동을 시작하다
그는 가스펠 그룹 에버 레디 가스펠 싱어즈와 알앤비 그룹 에이번스의 멤버로 음악 활동을 이어갔으며 1956년 페이머스 플레임스로 이름을 바꾼 에이번스와 그룹 제임스 브라운 위드 더 페이머스 플레임스를 결성하여 첫 싱글인 'Please, Please, Please'를 발표했다.

- 펑크뮤직의 선구자
이 싱글은 1956년 미국 빌보드 알앤비 싱글 차트 5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으며 이 여세를 몰아 발표한 'Try Me'는 1959년 미국 빌보드 알앤비 싱글 차트 1위에 올라 제임스 브라운의 인지도를 높여줬다. 그와 그의 그룹은 알앤비를 중심으로 하여 1967년에는 'Cold Sweat'를 팔표, 본격적인 펑크 뮤직을 선보였다.  

- 그룹의 해체와 솔로 활동
1968년, 그룹이 해체되고 제임스 브라운은 솔로로 활동하다 1970년대 제이비스(The J.B.'s)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그는 'Get Up (I Feel Like Being A) Sex Machine'과 'Get On The Good Foot' 싱글로 큰 성공을 거뒀으나 1970년대 중반부터 인기가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1980년대 후반에는 폭행과 약물, 불법 무기 소지, 과속 등의 사건으로 인해 수차례 수감되어 트러블 메이커가 되어 버렸다.

- 후배들에 엄청난 영감을 주다
그는 소울과 펑크 음악의 대중화에 엄청난 기여를 했기 때문에 '소울의 대부'라는 별명이 자연스럽게 붙었다. 그리고 그가 무대에서 노래와 함께 보여줬던 스텝과 댄스는 후배 가수들에게 강렬한 영감을 불어 넣어 줬고, 이를 보고 자란 뮤지션이 바로 '마이클 잭슨'이다. 마이클 잭슨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제임스 브라운의 무대를 보고 그대로 따라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또한 마이클 잭슨의 유일한 라이벌이었던 프린스에게도 제임스 브라운은 스타 중의 스타였기 때문에 항상 존경을 표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 소울의 아버지이자 그 자체
그의 소울은 흑인 음악 그 자체였으며 그 이후의 가수들은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의 스텝은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와 비보잉 댄서들의 브레이크 댄스로 발전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런 그의 흑인 음악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1986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최초로 헌액 되었고 2000년에는 송라이터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성탄절에 떠나다
이후 제임스 브라운은 꾸준하게 음악 활동을 하고 간간이 영화에도 카메오로 출연하면서 얼굴을 보이다 내한 공연을 했던 2006년 크리스마스에 폐렴에 의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마이클 잭슨이나 프린스 같은 시대의 정점을 찍은 뮤지션의 바탕에는 제임스 브라운이 있었다. 그가 있었기에 흑인의 소울이 존재했으며 펑크 뮤직과 그와 파생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인생을 그린 영화 '제임스 브라운' (블랙팬서 채드윅 보스만 주연)도 2014년에 개봉했으니 음악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은 감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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