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 조재휘 수습기자]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다른 명품 브랜드보다는 비교적 늦게 시작하였지만 명실상부한 명품브랜드의 입지를 굳건하게 지켜오고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의 패션계는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제국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브랜드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특히 깔끔하고 절제된 세련미가 넘치는 슈트와 드레스는 수많은 유명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각종 영화제 레드카펫이 그의 옷들로 넘쳐났다. 현재는 신흥 브랜드들과의 경쟁으로 인기가 한풀 꺾인 듯해 보이지만 시계, 향수, 화장품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입지를 굳히며 여전히 강력한 브랜드 인지도를 지키고 있다.

[사진/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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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계에 입문하기까지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1934년 이탈리아 북부의 피아첸차에서 출생했다. 의사를 꿈꾸었던 그는 밀라노 국립의대에 진학하였으나 군에 입대해 의무병 생활을 하면서 의사라는 직업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 더 이상 의학의 길을 가지 않기로 한다. 이후 아르마니는 1957년 우연한 기회에 밀라노의 라 리나첸테 백화점의 상품기획자로 일을 시작하고 남성복 판매 담당자로 근무하면서 패션 산업을 마케팅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키울 수 있었다. 

1961년 아르마니는 디자이너 브랜드 니노 세루티(Nino Cerruti)에 보조 디자이너로 들어가면서 패션 디자이너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니노 세루티는 새로운 라인의 남성복 '히트맨(Hitman)'을 위해 보조 디자이너를 찾던 중 아르마니의 재능을 알아보고 아르마니를 한 달여간 훈련시킨 후 곧바로 히트맨의 디자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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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지오 아르마니 설립 후 승승장구
1970년 아르마니는 니노 세루티에서 독립한 후, 히트맨의 공동 작업을 지속하면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활동하였다. 이후 1975년에는 그의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였던 세르지오 갈레오티(Sergio Galeotti)와 함께 패션 브랜드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 S.p.A.)를 설립한다. 

이후 1975년 첫 번째 컬렉션을 발표했는데 커리어우먼을 타깃으로 한 블레이저 슈트를 선보였다. 당시 커리어우먼들은 심플하고 간결한 아르마니 슈트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첫 번째 컬렉션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1980년대를 대표한 '파워 슈트(Power Suit)'의 시초가 되어 여성복의 변화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최대 의류 생산업체인 GFT 그룹과 계약을 맺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해 본격적인 해외 진출을 시작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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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을 다각화하며 토탈 브랜드로 성장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1981년, 젊은 층을 겨냥한 '엠포리오 아르마니'와 스포츠 웨어 '마니'를 론칭하고, 뒤이어 '아르마니 진', '아르마니 주니어' 등을 론칭하여 활동 영역을 더욱더 넓혀갔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지오, 아쿠아 지오, 일르, 엘르 등의 향수를 출시해 소비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내 아르마니는 크리스챤 디올에 이어 패션 디자이너로서는 두 번째로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했다.

1985년에는 공동 설립자인 세르지오 갈레오티가 사망하면서 브랜드 조르지오 아르마니 역시 잠시 위기를 겪었지만, 아르마니가 직접 생산 및 유통, 마케팅 등 모든 역할을 도맡으면서 위기를 극복했다. 최근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호텔 및 가전제품, 외식사업에도 진출하여 패션을 뛰어넘는 토탈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성장하고 있다.

[사진/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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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과 비즈니스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이탈리아 패션 대통령 조르지오 아르마니. 그는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성공한 기업가로 꼽힌다. 그리고 최근에는 패션쇼를 위해 공항을 통째로 빌리는 등 그의 브랜드를 세계적 명성을 지닌 고급 브랜드로 이끌어가기 위해 여전히 활발히 활동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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