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대규모 민중항쟁의 봉기와 진압으로 좌익세력의 입지가 약화된 가운데, 중도 좌우세력을 중심으로 추진된 합작 운동은 간접선거로 당선된 민선과 관선으로 이루어진 ‘남조선입법의원’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1946. 12. 12) 

중도 좌우세력 중심으로 추진된 좌우합작과는 달리 입법의원의 구성 결과는 민선에서 극우세력이 대거 당선되어 부정선거 의혹을 불러 일으켰고 온건 좌익의 참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사실상 극우와 중간 우익세력으로 구성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강경한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입법의원의 구성(남조선과도정부 1947. 2. 5)을 통해 미군정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대시킬 수 있었고 이와는 반대로 새로이 결성된 남로당 중심의 좌익 세력은 점차 극좌세력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10월 항쟁 이후, 1947년에 접어들어서도 양곡수집과 배급을 둘러싼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1947년 이후에도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중도파 정치 세력들을 중심으로 좌우 합작 운동은 계속 되었다. 좌우합작위원회는 제3전선인 민주주의독립전선(좌우합작에 참여하지 않았던 소수파 정치세력의 집합체)과의 연합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런 와중에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공산주의 폭동으로 위협을 받고 있던 그리스와 지중해에서 소련의 팽창으로 압력을 받고 있던 터키에 경제원조와 군사 지원을 선언하는 트루먼 독트린(1947. 3 .12)으로 인해 냉전은 격화되었다. 

그리고 1947년 4월 미국은 모스크바 4국 외상회의에서 소련에 미, 소 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요청하여 미, 소 공위는 5월 21일 재개되었다. 하지만 1차 때와 마찬가지로 협의단체의 자격 문제로 인해 갈등이 표출되었다. 

미국은 공위에서 의사표현의 자유원칙을 존중할 것, 단지 회원 1천 명 미만의 단체, 반탁위원회 소속단체의 참여 배제만을 동의하였다. 또한 1947년 6월 5일에는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유럽경제 재건 계획인 마샬 플랜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 플랜의 연장선으로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결정하였고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할 수밖에 없다고 소련 측에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 (9.16) 

소련은 반탁위원회에 소속된 조직 등의 참여만 동의하였고 마샬 플랜과 유엔에 상정한 것에 대해서는 맹렬히 비난하며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외국 군대를 즉각 철수한 후 한국정부의 수립은 한국인 스스로의 손에 맡기자고 주장하였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바야흐로 분단국가 수립의 초읽기가 시작된 것이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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