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정부 수립 운동이 난항을 겪고 있는 동안 서울에서는 수많은 정당이 결성되어 난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1945년 10월 23일에는 조선호텔에서 각 정당 대표 2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결성되어 좌익과 우익을 망라하는 남한 내 유일한 정치체제가 되는 것을 꾀했다. 특히 임시정부와 좌익을 끌어들이기 흡수, 포석하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결국 좌익은 협의회를 떠났고 임시정부는 특별정치위원회라는 독자적인 조직화 방안을 모색했다.

3·8선을 기준으로 남북 각각 군정이 실시되는 가운데 미국과 영국, 소련 3국 외상이 모스크바에 모여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이들은 여기서 한국문제에 관한 논의를 하여 이른바 ‘신탁통치안’을 결정하게 된다. 

신탁통치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민주정부를 수립한다. 
2. 한국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3. 미·영·소·중의 4개국이 공동관리(신탁통치)하는 기한은 5년으로 한다. 
4. 2주일 이내에 미·소 사령부의 대표회의를 개최한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국내 정치세력은 찬반양론으로 분열되었다. 여기에 국내 언론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이 독립을 주장했다는 식의 왜곡 보도를 하여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좌익을 반민족주의자, 매국노로 규정하는 분위기로 만들었다. 

이처럼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1946년 3월 20일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으나 공동위원회에 참여할 정치 단체의 자격 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 간의 이견으로 결렬되고 만다.

여기에 미군정은 공동위원회에서 미국측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좌익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게 된다. 특히 1946년 5월 15일,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이 조선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발행했다고 하여 조선공산당의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폐간시켰다. 

이로 인해 조선공산당의 이미지는 남한에서 최악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조선공산당 역시 이에 분노해 반미투쟁노선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정읍 연설에서 최초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써 반탁운동을 위해 결집되었던 우익은 반탁운동을 반공반소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이승만 및 한민당세력 등의 극우세력과 좌우합작을 모색하는 김규식 중심의 온건 우익세력으로 분화되었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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