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 / 디자인 이연선]
▶ 호머 베절릴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
▶ 출생-사망 / 1863년 1월 26일 ~ 1949년 8월 5일
▶ 국적 / 미국
▶ 활동분야 / 언어학자, 사학자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이자 육영공원 교수. 대한제국의 독립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헤이그 비밀 밀사로 활동.

-육영공원에서 교직생활을 하다
호버 베절릴 헐버트는 미국 버몬트 주 뉴헤이번 출신으로 1863년 1월 26일 태어났다. 그는 미들베리 대학교 총장이었던 칼빈 헐버트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그의 외할아버지가 창립자인 다트머스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획득 한 후 유니언 신학교에 들어가 2년 간 공부하였다. 그리고 그가 23세가 되던 1886년(조선 고종 23년),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 교사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영어를 가르쳤다.

- 한글을 마스터하다
헐버트의 한글에 대한 학구열은 대단했다. 그는 자비로 한글 개인교사를 고용하여 3년 만에 한글로 책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게 되어 최초의 순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1891)’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우리 고유의 한을 품은 노래인 아리랑을 최초로 채보하여 구전으로만 남아오던 것을 악보로 표현하였다.

- 선교사로 돌아오다
조정은 재정상의 이유로 육영공원을 축소 운영하게 되었다. 이에 헐버트는 1891년 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893년에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다시 가르쳤으며 감리교 출판부인 삼문 출판사의 책임을 맡아 1895년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을 다시 발행하였고, 최초의 영문 소설 한국어 번역판인 '텬로력뎡'(천로역정)을 출판하는 등 조선의 출판 기술을 한층 발전시켰다.

또한 한성사범학교와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관립중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한국 역사에도 큰 관심을 가져 1908년에는 관립중학교 제자 오성근과 함께 ‘대한역사’라는 한글 역사 교과서를 출판하게 되었다. 원래 상·하권으로 출판하려던 이 책은 일제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어1909년 모두 몰수되어 불태워졌다.

-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1890년대에 이르러 조선이 일제에 위협을 받자 헐버트는 조선의 자주권회복 운동을 지원하게 된다. 특히 명성황후가 시해된 1895년 을미사변 이후 헐버트는 고종을 호위하면서 자문역할을 하는 등 막다른 곳에 몰린 조선이 서방 국가들과 외교와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창구 역할을 해왔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헐버트는 을사늑약이 불법적이고 따라서 무효임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노력하였다. 이에 대한 일환으로 그는 1905년 미국 대통령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하려 하였고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의 사전 작업에 큰 공헌을 하여 제 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하였다.

일제는 이런 헐버트의 활약을 결국 깨닫게 되었고 그를 대한제국에서 추방하였다. 미국으로 돌아간 헐버트는 서재필, 이승만을 위시한 미주 독립운동가들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미국 각지를 돌며 일보제국의 침략행위를 비판하는 등 미국에서도 그의 조선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 한국에 묻히다
헐버트는 미국뿐만 아니라 헤이그를 비롯한 전 세계의 회의와 강좌에서 일본 제국의 침략에 규탄하는 등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 왔다. 그리고 한반도의 독립 후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그는 드디어 42년 만에 방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노환과 여독에 의해 방한 1주일 후 사망하게 되었고 8월 11일 최초로 외국인 사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 지금의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마지막으로 미국에서 출국하면서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며 한국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보여주었던 헐버트. 지구 반대편에서 온 이 외국인 애국자의 아름다운 마음은 현재까지도 우리에게 ‘진정한 애국심’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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