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1920년대 일본인 기업이 증가하면서 여기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였고 일제의 식민지 공업화 정책으로 인해 한국인 노동자들은 장시간의 노동에 도 불구하고 낮은 임금을 받는 등 대개가 열악한 노동환경과 조건에서 근무해야 했다. 

이에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1920년 4월 조선노동공제회가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성립되었고 1921년 9월부터 노동자들은 노동시간의 단축, 열악한 노동환경의 개선, 임금인상 등 생존권 투쟁의 합법적 양상으로 노동 쟁의를 전개하였다. 

1922년 10월에는 노동자와 사회주의자가 중심이 되어 ‘신사회 건설’, 계급적 단결‘을 강령으로 내걸었고 이 사상의 영향으로 1927년 조선노동총동맹이 결성되어 쟁의의 쟁점이 생존권을 넘어 단체교섭권 확립, 8시간 노동제의 실시 등 노동자의 권익 신장과 제도의 개선 방향으로 잡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 전시 동원 정책이 진행되면서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더욱 나빠졌고 통제 역시 매우 심해졌다. 때문에 그 동안 합법적으로 진행되어 오던 노동 쟁의 비합법(폭력) 투쟁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더불어 노동운동이 단순한 쟁의가 아닌 일제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반제국주의적 항일 민족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는데 1936년 이후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과 노동 운동에 대한 강경한 대응으로 큰 힘을 내지 못해 쟁의 발생 건수와 참가자의 수가 급격히 감소하다 1940년 이후에는 거의 소멸하게 되었다. 

이렇듯 노동자라는 새로운 개념이 생기면서 노동 운동도 발생했지만 개념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통을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백정 등 신분 하위층 들이었다. 갑오개혁(1894)로 인해 신분제는 법적으로 철폐되었지만 백정들은 호적에 ‘도한’이라고 적거나 붉은 점을 찍어 표시해 둠으로써 차별하였다. 

이들은 이런 행위들 때문에 입학이 거부되거나 중도에 학교를 그만둬야 하는 등 사회적인 차별을 계속 받아왔다. 이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이학찬, 강상호 등 백정들이 조선형평사(1923.04.25.)를 조직하면서 형평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계급 타파, 모욕적 칭호의 폐지, 교육의 균등과 지위의 향상 등 사회적 차별 철폐를 통한 공평한 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일본에 큰 차별을 당했다. 그런 와중에 백정 등 최하층은 자국민에게도 차별을 받는 등 총체적으로 차별이 만행하던 시기였다. 그런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일제의 강경한 대응에 성공하지 못 한 안타까운 시대였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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