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한말 이후 신교육을 받은 여성, 즉 신여성이 늘어나면서 여성의 사회의식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3·1운동에서 유관순 열사의 활동으로 인해 여학교 단위의 만세 운동 전개 이후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애국부인회, 부인독립회,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등의 비밀결사와 여성 계몽 목적으로 약 30여 개의 여성단체가 조직된다. 또한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에 영향을 받은 조선여성동우회가 결성되었는데 내부에서 파벌 경쟁이 발생하여 분열 및 대립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1926년 11월 정우회 선언 (정우회가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진영과의 협동전선을 제창하여 신간회 결성의 기폭제가 되었던 사회주의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밝힌 선언) 전반적으로 파벌 해소운동이 확산되면서 사회주의 계열 내부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신간회 출범 이후 김활란 등이 중심이 되어 여성 노동자의 권익과 생활 개선을 내걸고 여성계의 민족 유일단인 근우회(1927.05)가 결성되었다. 

근우회는 신간회와 자매단체의 성격을 띠고 한국 여성의 대동단결을 꾀하여 모든 운동을 효율화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이 조직은 크게 성하여 1929∼1930년에는 지회의 수가 70여 개로 확대되기도 하였고 도쿄나 간도 창춘 등 국외에까지 그 세력을 높였다. 하지만 사상이 다른 사람들이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모인 조직은 결속력이 그리 강하지 못했다.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 운동자들과 민족주의 계열 여성 운동자들은 서로 다른 사상 때문에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되자 함께 해산되고 만다. 

근우회는 비록 독립적인 성격의 조직으로 남을 수 는 없었지만 여성에 대한 사회적, 법률적인 일체의 차별을 철폐하고 일체의 봉건적인 인습과 미신 타파, 여성의 삶을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조혼 방지와 결혼의 자유, 부인 노동에 대한 임금 차별 철폐 및 산전 산후 임금 지불, 부인과 소년공에 대한 위험한 노동 및 야업 폐지 등 현대까지 이어오던 여성 운동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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