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 기자 / 디자인 이연선]

▶ 유진 앙리 폴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
▶ 출생-사망 / 1848.6.7 ~ 1903.5.8
▶ 국적 / 프랑스
▶ 활동분야 / 화가
▶ 대표작품 / ‘황색의 그리스도’, ‘타히티의 여인들’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로 인해 타히티섬으로 떠난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  

-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한 고갱. 정치부 기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혁명의 정치적 격정기를 피해 페루의 리마로 가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의 아버지는 심장병으로 사망하게 되고 고갱은 가난한 유년시기로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1854년 고갱의 가족은 다시 프랑스로 오를레앙에 정착하게 되었지만 가난은 여전하였고 1865년 12월 고갱은 바다를 동경하여 선원이 되어 상선을 타고 라틴아메리카와 북극 등 지구촌 여러 곳을 다녔다. 하지만 1871년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듣게 된 후 선원을 그만두게 되고 파리로 돌아와 증권거래점의 점원이 된다.

- 인상파 회화에 관심을 가지다

그는 1873년 덴마크 여성과 결혼하면서 가난한 생활을 벗어나게 된다. 고갱은 이때부터 인상파 작가들의 회화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림을 조금씩 그리기도 하였다.

고갱은 1876년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하여 C.피사로(1830∼1903)와 친분을 쌓게 되었고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이 붕괴되자 주식거래점원이었던 그는 전업화가로 이직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그는 1883년 증권거래점에서 나와 루앵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 퐁타방 파를 창립하다

그는 증권거래점에서 일을 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깨달았고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마음먹은대로 일은 풀리지 않았고 결국 가족과 헤어져 한 아이만 데리고 파리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여전히 궁핍한 상태였지만 1886년 6월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하여 그림에 전념하게 되었고 차차 고갱 특유의 화풍을 수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화풍은 젊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는 이들과 함께 ‘퐁타방 파’를 창립하게 된다.  

- 고흐와의 우정을 쌓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인정받기 시작할 무렵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고흐와 로트레크 등을 알게 된다. 이 중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고흐와는 남프랑스 아를의 ‘노란집’이라는 화실에서 같이 살 정도로 돈독한 사이가 된다.

- 원시적인 생활을 동경하다

고흐와의 생활이 끝난 후 퐁타방으로 돌아온 고갱은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그는 문명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1891년 4월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홀연히 떠나버린다.

- 타히티 섬에서...

그는 1891년 9월 마타이에아 섬으로 가서 자신이 동경했던 생활을 하면서 작품활동을 했다. 하지만 고질적인 향수병과 고독, 가난 때문에 다시 파리로 돌아가기를 바랐고 결국 2년만인 1893년 프랑스로 돌아오게 된다. 그렇게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관심을 관심은 받았지만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해 좌절하게 되고, 낙담한 그는 다시 1895년 6월 타히티로 돌아간다.

- 고독한 죽음

파리에서 돌아온 고갱은 심한 우울증과 영양실조, 병으로 인해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런 와중에 그는 작품활동을 해 오면서 1901년 마르키즈제도의 히바오아섬으로 이주를 하였고1903년 5월 8일 심장마비로 고독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문명을 벗어나 원시를 동경했으나 고독은 견딜 수 없었던 고갱. 그의 작품은 고흐와 더불어 역사상 가장 저평가된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훗날 피카소 등 당시 젊었던 화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줬던 그의 작품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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