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일본은 군국주의 체제의 강화와 경제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만주의 대륙침략을 강행했다. 이에 중국은 일본과 전쟁을 벌였지만 참패하고 말았고 일본에 의해 ‘만주국(1932. 3. 1)’이라는 괴뢰정권을 허용해야 했다. 

이로 인해 중국의 일본에 대한 항일감정이 매우 커지게 되었고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한국과 중국이 연합작전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독립 운동세력에 커다란 국면 전환의 기회가 되었다. 

이로 인해 1935년 7월 남경에서 ‘반임정, 비 김구세력’의 결집을 표방한 의열단, 신한독립단,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한독립당 등이 참여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가맹 세력간의 성향과 노선이 상이하였기 때문에 갈등이 많았고 결국 조소과 이청천이 탈당하게 된다. 조소앙은 1935년 9월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고 이청천은 1937년 4월 조선혁명당을 결성하게 된다. 

1935년 11월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에 대항하여 중국국민당 정부와의 유대를 강화하던 김구는 항주에서 독자적으로 임시정부 중심의 ‘한국국민당’을 결성하였다.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이 계기가 되어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중국 관내 지역에서는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김구의 한국국민당은 민족혁명당에서 탈퇴한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 등과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다. 

1937년 12월 김구의 통일전선 요구로 남경에서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제남경한족회 등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 참여하지 않은 단체들이 모두 모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한다. 

중일전쟁이후 김원봉은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무장 부대인 ‘조선의용대(1938. 10)’를 창설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 한일전선의 변동에 따라 이를 따라가던 조선의용대 중 화북지역에서의 무장투쟁을 요구하던 일부 대원들이 분열되어 중국공산당 관할 구역으로 이동해 버렸다.

이들은 중국공산당의 당군인 홍군과 함께 항일 무정 투쟁에 참가하여 대승을 거두게 되었고 이후 공산주의계 조선독립동맹으로 흡수(1942. 8)되어 북한군의 전신(前身)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의용대 본대는 이후 한국광복군으로 합류(1942. 10)하게 된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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