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병용 / 디자인 이연선]

▶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 출생-사망 / 1935년 10월 12일 ~ 2007년 9월 6일
▶ 국적 / 이탈리아
▶ 활동분야 / 성악가

다양한 레퍼토리와 높은 음역에도 힘차게 뻗는 맑고 깨끗한 음색으로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세계 3대 테너로 불렸다.

- 아마추어 테너였던 아버지의 영향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이탈리아 중북부 모데나 지역에서 빵 가게를 하는 아버지 페르난도와 담배공장에서 일하는 어머니 아델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파바로티는 항상 음악 속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 페르난도가 아마추어 테너였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자 합창단 활동을 재개했고, 어린 파바로티도 자연스레 아버지를 따라가 노래를 따라 부르며 성악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파바로티는 아마추어합창단과 교회성가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세계적인 성악가로서의 자질을 드러냈다.

- 지휘자 리처드 보닝과의 만남

1961년 모데나 극장에서 오페라 ‘라 보엠(La Boheme)’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한 파바로티를 본격적으로 세계적으로 알린 사람은 지휘자 리처드 보닝이었다.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이며 영향력 있는 제작자였던 리처드 보닝은 1963년 호주 투어에서 자신의 아내인 소프라노 서덜랜드의 파트너를 할 테너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의 높은 음역과 180cm라는 큰 신장이라는 조건 때문에 그녀와 사랑스러운 연인처럼 보일만한 파트너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이때 리처드 보닝의 눈에 띤 신성 파바로티는 180cm의 신장과 테너가 낼 수 있는 가장 높은 음역인 ‘하이 C’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다양한 레퍼토리가 가능했기 때문에 아내의 파트너로서 적임이었다. 이에 리처드 보닝은 파바로티에게 호주 투어를 제안했고, 파바로티는 이를 받아들여 세계적인 성악가로 성장하게 된다.

- 세계 3대 테너의 탄생, ‘쓰리 테너 콘서트’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파바로티에게 ‘세계 3대 테너’라는 명칭을 준 콘서트는 바로 ‘쓰리 테너 콘서트’이다. 파바로티는 1988년 플라시도 도밍고의 지원과 함께 백혈병을 완치한 호세 카레라스가 설립한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이 주최하는 자선 콘서트를 개최해 호응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이들은 전 세계를 순회하며 공연을 하여 막대한 수입과 함께 ‘세계 3대 테너’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후배 성악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이후 3명의 남자 성악가가 모여 ‘빅3’나 ‘쓰리 테너’라는 이름으로 합동공연을 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생겨나기도 했다.

- 첫 번째 아내와의 이혼 그리고 비서와의 재혼

파바로티는 1961년 첫 번째 아내 아두아 베로니와 결혼하여 세 딸의 아버지가 되었다. 하지만 파바로티는 무수한 염문설의 주인공이 되었고, 아내 아두아는 고향에서 아이들과 머물며 파바로티의 명성을 이용한 사업을 하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눈감아주었다.

하지만 1995년 한 연예잡지에 의해 파바로티가 개인비서인 35살 연하의 니콜레타 만토바니와 불륜을 저지르는 사진이 보도되자 파바로티와 아두아는 합의이혼을 하게 된다. 이후 파바로티는 니콜레타와 재혼을 하여 쌍둥이를 낳지만, 아들은 죽고 딸만 얻게 된다.

- 천상의 목소리의 타계와 유산 분쟁

파바로티는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개막식을 마지막 무대로 생을 마감한다. 당시 파바로티는 이미 건강이 나빠져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도 립싱크를 해야만 했다. 이후 췌장암 말기 판단을 받고 미국으로 가 수술을 하였으나 치료하지 못하고 결국 2007년 71세의 나이로 별세한다.

파바로티가 죽고 나서 그의 재산을 둘러싼 첫 번째 아내와 두 번째 아내의 분쟁이 있었다. 파바로티의 유언장이 두 번째 아내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파바로티의 매니저는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당사자 간의 원만한 합의를 통해 유산을 공정하게 분배했다고 밝히며 사건은 마무리됐다.

파바로티는 고음에서도 변치 않는 깨끗한 음색으로 관객에게 감동을 전하며 성악의 대중화를 선도했다. 현재까지도 매년 그의 서거일이면 전 세계 많은 음악인이 그를 추모하기 위한 추모콘서트를 개최하는 등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이처럼 그가 남긴 음악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전하며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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