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지영/디자인 이연선]

▶ 니콜로 파가니니 (Niccolo Paganini)
▶ 출생-사망 / 1782년 10월 27일 - 1840년 05월 27일 
▶ 국적 / 이탈리아
▶ 활동분야 / 바이올린 연주가, 작곡가
▶ 주요작품 /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D장조 Op.6,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 「라 캄파넬라」 b단조 Op.7, 바이올린 협주곡 제3번 E장조, 24개의 카프리치오 

이탈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 및 작곡가. 19세기 가장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가로서 그의 작품은 테크닉과 즉흥적 연주가 특징이며, 오늘날 연주하기가 곤란할 정도로 어렵다.

- 스승의 실력을 따라잡는 파가니니의 재능
파가니니는 다섯 살 무렵부터 바이올린 연주를 시작했으며 음악 교습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스승의 실력을 따라잡는 재능을 선보였다. 그의 재능을 일찍이 간파한 파가니니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혹독한 연습을 시켰다. 그리고 1795년, 파가니니는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후 그는 1810년부터 이탈리아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을 순회하며 본격적인 연주 여행에 나서 유럽 전역에 그의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 한 두 곡만 듣고도 모두 팬이 되다
파가니니는 고난이도의 연주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해내며 유명세를 떨쳤다. 그의 연주 실력은 가히 놀라워 사람들은 그가 연주하는 한두 곡만 듣고도 모두 팬이 되었다. 그는 바이올린 한 대로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내기도 하고 갖가지 동물의 울음소리 또한 재현해냈다. 여기에 활이 아닌 나뭇가지로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하였고, 현을 한 두 개만 걸고 연주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경박한 잔재주로 관심을 끈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존재하기도 한다.

-놀라운 재능, 기괴한 소문을 만들어내다
나폴레옹의 여동생이며 루카의 군주인 엘리자 보나파르트는 그의 연주에 열광하던 팬 중 하명 이었다. 어느 날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의 현을 두 개만 사용해 곡을 연주하자, 엘리자는 “하나로만 연주할 수도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파가니니는 정말로 G현 하나로만 연주하는 곡을 만들었다. 이에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바이올린 G현은 젊은 시절 그가 살해한 애인의 창자를 꼬아 만든 줄이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는데, 그만큼 그의 연주가 믿을 수 없을 정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 그의 재능을 시기한 사람들은 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탁월한 실력을 얻었으며, 바이올린 활을 움직이는 것은 그가 아니라 사탄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 개성 넘치는 연주자 시대를 열다
파가니니는 작곡가로서보다는 연주가로 더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악보 출판보다는 즉흥 연주를 더욱 중시했으며,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들조차 그의 <24개 카프리치오> 악보를 보고 “이건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말했을 정도로 고난이도 연주로 유명했다. 그는 제자를 거의 두지 않아서 특유의 바이올린 연주 기법을 후대에 전하지 못한 것이 현재 음악사적으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개성 넘치는 비르투오소(명인 연주자)의 시대를 열고 낭만주의를 예고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말년을 병으로 보내다 생을 마감하다
유럽 순회 연주회는 결국 파가니니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쳤다. 여기에 젊은 시절 걸린 매독과 수은 치료법으로 인한 부작용까지 더해지며 그의 몸은 더욱 나빠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후두결핵까지 걸린 그는 목소리조차 잘 나오지 않게 되자, 이때부터 어린 외아들이 늘 그의 곁을 지키며 대변인 역할을 해주었다. 또한 말년에 투자 실패로 재산의 상당 부분을 잃게 되며 몸과 마음이 망가진 채 고국으로 돌아가 니스에서 7개월 동안 앓다가 결국 세상을 떠난다.

현재로서는 가늠이 불가할 정도로 니콜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는 신기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렇게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그의 연주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공포,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파가니니는 한 평생을 루머에 시달리다 삶을 마감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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