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 정착하게 되었고 곧바로 1940년 9월 17일, 국군이자 당군인 광복군을 창설하게 된다.

한국광복군 선언은 한국군이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를 타도하기 위해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이어가고 나아가 동아시아 인민들의 자유와 평등을 쟁취한다고 밝혔다.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에는 지청천이, 참모장에는 이범석이 임명되었다. 

임시정부는 이전까지는 주로 외교나 선전, 의거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펼쳤지만 광복군의 창설로 인해 정규군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충칭에 정착하기 전까지 쫓겨 다니는 신세였기 때문에 여력이 많지가 않아 중국의 지원이 필요했는데 결국 1941년 12윌 1일 중국정부 군사위원회에 직속되는 것을 수락하는 선언문을 발표하며 겨우 군수물자를 충당할 수 있었다.

광복군은 3개의 지대(支隊)로 편성되었는데 제1지대장에 이준식, 제2지대장 공진원, 제3지대장 김학규가 그 자리를 맡았다. 또 1941년 1월에는 제5지대가 편성되어 나월환이 통솔하였고 소대, 중대, 대대, 연대, 여단, 사단 등의 6단으로 기본 평성이 완성되었다. 

광복군은 또한 ‘광복(光復)’이라는 간행물을 발행하여 애국 청년과 일본군에 징병되어 온 한국청년을 유치하는 등 선전, 홍보 역할도 해냈다. 

1941년, 일제는 미국을 침공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한국광복군은 연합군에 참여해 싸우겠다고 밝히며 일제에 대해 선전 포고를 했다. 이에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분열이 되어 있었던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 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그 규모가 커졌다. 

1943년에는 영국군과 함께 인도와 버마 전선에 참여하였고 미국에서 파견한 군인으로부터 특수 임무 수행을 위한 훈련을 받기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인 한국광복군은 1944년 중국군의 지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한국광복군의 규모는 창설 당시 30여 명에 불과했지만 꾸준한 선전과 활동으로 1945년 8월에는 700여 명까지 규모가 확장되었고 일제가 곧 전쟁에서 패할 것이라고 판단한 임시 정부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땅을 되찾기 위해 8월에 국내에 진공할 부대를 편성하는 등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일제가 1945년 8월 15일, 본토에 원폭을 당하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바람에 국내 진공 작전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1945년 8월 15일 모든 한국인들이 염원하던 광복이 이뤄졌고 한국광복군은 임시 정부와 함께 귀국하려 했지만 미군정이 한반도 내에 어떤 정부나 군대도 인정하지 않겠다고 발표하여 한국광복군은 1946년에 군대가 아닌 개인의 자격으로 입국해야 했다. 이로 인해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의 광복을 위해 애썼지만 정작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대한민국 국군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되고 만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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