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 디자인 이정선] 임시정부는 일제의 끈질기고 집요한 추적을 피해 여러 곳을 이동하였고 1940년 마침내 충칭에 그 터를 잡게 되고 재정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충칭 입성 전인 1940년 8월 우파 3당이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결성, 임시정부의 세력 기반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충칭 임시정부는 1940년 10월 4차 개헌을 실시하여 국무위원제를 주석제로 바꾸었고 초대 주석은 김구가 되었다. 이로 인해 임시정부는 정부, 한국독립당, 광복군이 모두 갖춰져 정, 당, 군의 삼위일체제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충칭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임시정부의 정치이념과 독립 전쟁 준비태세를 천명하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하게 된다.

건국강령은 민족 내부에 정치, 경제, 교육의 평등을 실현하여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모순을 제거하고 나아가 세계 인류의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평등을 실현하자는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기본 이론적 틀로 삼았고 국토를 탈환하는 ‘복국’과 해방된 조국에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는 ‘건국단계’를 제시하였다.

또한 토지와 주요산업의 국유화, 무상의무교육 실시 등 삼균제도를 실시하는 과정을 구체화했는데 이와 같은 사회주의적인 면도 포괄하여 일종의 민주사회주의체제를 표방하게 되었다.

또한 충칭 도착 직후인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군이자 당군으로 광복군을 창설하게 된다.

한국광복군 선언에 따르면 한국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를 타도하기 위해 엽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이어나간다고 되어 있으며 나아가 동아시아 인민들의 자유와 평등을 쟁취한다고 되어 있다.

이후 임시정부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민족혁명당을 합류시키고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대일, 대독 선전포고(1941)를 하기에 이르렀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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