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체스판과 자잘한 정치판
거대한 체스판과 자잘한 정치판
  • 보도본부 | 정광윤
  • 승인 2013.12.04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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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정광윤 칼럼니스트]   미국의 카터 행정부 시절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K. Brzezinski) 박사는 1997년에『거대한 체스판』이란 역작을 펴냈다. 이 책에서 브레진스키는 “유라시아는 세계 일등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체스판이다.”라고 언급했다. 브레진스키가 유라시아를 ‘거대한 체스판’이라고 부른 이유는, 탈냉전 시대 유라시아 지역에 대해 국가 간의 파워 게임과 역학 관계가 대단히 복잡하게 전개되는 곳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브레진스키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책을 쓸 당시만 해도 유일 초강대국이었던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도모하는 관점에서 세계의 지정학적 게임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미국의 책략을 제시했다.

   그 이후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유라시아를 비롯한 세계정세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중국의 부상(浮上)과 글로벌 질서의 동요 등으로 유일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의 위상 역시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한 가지 변함이 없는 것은 지구촌 전반의 유동성과 복합성인데, 이런 경향은 오히려 더 심화되고 있다. 이는 미국의 국제적 위상 및 국내적 사정과 무관하지 않은 일이다. 특히 2008년을 전후로 터져 나온 글로벌 금융 위기는 그 진원지이자 세계 경제의 중심국인 미국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일방주의에 따른 여타 국가들의 견제와 반발에 대해 이제는 미국이 이를 제어하기가 어렵다. 

 
   반면에 미국의 잠재적 대항마로 국제사회의 이목을 끌어왔던 중국은 미국의 위상 저하로부터 오는 반사 이익을 누리고 있다. 여기에 중국은 미국과 유럽 등의 선진국과는 달리 경제 성장의 지속을 통해 국력을 강화해왔다. 공산당 특유의 안정적인 리더십 승계도 중국의 경쟁력을 키우는 데 일조하고 있다. 아무튼 이제는 미국과 중국이 거의 쌍벽을 이루는 ‘G2 시대’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G2 시대의 도래는 미국의 부담을 완화하고 글로벌 질서의 불균형을 시정한다는 점에서는 바람직한 일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세계 평화의 보증수표일지는 미지수이다. 오히려 G2의 상이한 이해관계가 첨예화될 경우에는 과거 냉전 시대와 비슷한 국제 질서의 양극적 갈등구조가 재현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보다 더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G2라고 해서 이 복잡하고 유동적인 국제 질서를 관리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어떤 면에서는 지역을 불문하고 나라 안팎의 전선(戰線)이 더 확대되는 반면에, 이를 관리할 일국적-세계적 차원의 정치력과 리더십은 취약해 세계정세의 불확실성이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여기에 제3세계를 중심으로 세계 인구는 지구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늘어나는 반면에 천연자원은 점점 고갈되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됨에 따라 다수 대중들의 삶의 기회가  침식되고 있는 것도 이런 흐름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요컨대 탈냉전 시대는 ‘평화 시대’가 결코 아니며, 오히려 갖가지 모순과 갈등들이 뒤엉키는 혼돈의 시대로 변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는 10여 년 전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명명한 ‘거대한 체스판’은 여전히 유효한 개념이다. 그것도 단지 유라시아만이 아니라 지구촌 전반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시각을 좁혀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야말로 ‘체스판 중의 체스판’임을 우리는 오래 전부터 실감해왔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국민들이 비교적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은 초강대국인 미국이 대한민국의 우산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미국의 위상이 과거보다 못하고 중국 등 주변 강대국들의 팽창 욕구가 커지면서 한반도 안보는 과거보다 더 불안한 상황이다. 여기에 30대 초반의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한 북한이 어떤 모험을 감행할지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점도 한반도 정세의 불안정성을 가중시키고 있다.

   『강대국의 흥망』으로 잘 알려져 있는, 영국의 국제정치학자 폴 케네디(Paul M. Kennedy)는 “한국은 네 마리의 거대한 코끼리에 둘러싸여 있어 이들을 화나게 하면 상처를 입거나, 심하면 밟혀서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들어 주변국들의 국수주의(國粹主義)와 물리적 충동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런 중차대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현명한 선택을 요구받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폴 케네디의 진단처럼 대한민국은 이 복잡한 한반도의 지정학 게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기는커녕 잘못하면 ‘고래 싸움의 새우등 신세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 노무현 정부가 표방했던 ‘동북아 중심국가’론이 허언(虛言)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우리의 현주소 때문 아니었던가!

   그렇다고 주변국들의 전략에 수세적으로 몰리거나 사태의 흐름에 내맡길 일은 전혀 아니다. 한반도 안보야말로 대한민국의 미래와 우리 국민들의 생존이 달려 있는 문제이기에 치열한 고뇌와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어떤 점에서는 대한민국이 호전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는 등 맹수의 발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외교력을 발휘하기에 유리한 측면이 있다. 이런 치열한 파워 게임 무대에서 각 국가의 특성을 감안한 맞춤형 외교, 나아가 입체적 외교를 펼친다면 대한민국의 국익을 도모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국력, 그 중에서도 소프트 파워는 무시하지 못할 만큼 커져 있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당당하되 유연한 외교를 펼쳐야 한다. 물론 국방 태세 역시 소홀히 할 수 없는 요소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국내적 안정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에 앞장서야 할 대한민국의 정치권은 국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당리당략에 사로잡혀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복수정당제를 운영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정당마다의 입장과 시각은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원활한 의사 결정을 하라는 것이 대의 정치의 정신이 아닌가! 지금처럼 각 정당들이 당파성에 깊이 빠져 극단적인 주장으로 마주 보고 달리는 열차처럼 충돌하는 것은 민주 정치의 참 모습이라고 하기 어렵다. 단적으로 말해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정당이 존재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국회에 최소한의 문제 해결 능력조차 없다면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

   더욱이 지금은 태평성대가 아니다. 민생 경제의 어려움에다 안보 불안까지 겹쳐 있다. 한반도 주변에는 날마다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의미심장한 소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어떤 예기치 않은 일이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는 비상 국면이다. 국회가 태평성대처럼 한가롭게 자존심 싸움을 벌일 때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현안인 국가정보원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사법부의 재판이 예정되어 있는 마당에, 이 문제 때문에 정국을 파행시키고 대한민국 정부를 뒤흔드는 것이 국익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지난 4일에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지도부가 만나 국회 정상화에 합의를 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양당은 더 이상 지체 말고 안개 정국을 말끔히 해소해야 한다.

   『거대한 체스판』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예리한 혜안이 번득이는 책이지만, 미국의 이익에 치중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특정 국가의 지식인으로서 어쩌면 당연한 처사이다. 대한민국에도 이런 지식인과 지도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치열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대한민국의 진로를 위해 노력하는 지식인과 지도자가 얼마나 있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정치 지도자들에게 주문하고 싶다. 심오한 혜안까지는 기대할 수 없다 하더라도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발휘해서 작금의 망국적인 대치 정국을 종식시켜야 한다. 말하자면 좁은 대한민국 영역 안의 땅따먹기에 매몰되지 말고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의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개척하는 데 매진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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