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1919년 3월을 빛나게 했던 3·1 운동은 국민들에게 국가의 자주권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독립에의 열망을 불타오르게 했지만 일본의 무자비한 무력 탄압에 의해 저지됐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국민들이 독립을 요구하더라도 독립을 할 국가, 즉 정부가 없으면 안 됨을 깨닫고 임시정부를 세우기 시작한다. 

대한국민의회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받은 한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회원 2,000명으로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조직, 기관지 한인시보를 발행하였다. 그 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국내에서는 3·1 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1919년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로 개편하였다.

주요 인물로는 대통령에 손병희, 부통령에 박영효, 국무총리에 이승만 등이 있었으며 대한민국의 독립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혈전 결의를 선포하였다. 이를 위해 의회는 의연금을 모집하고 군사교육을 위해 뤄쯔거우에 훈련소를 건립한다. 

상해 임시정부
3·1운동 직후 일본통치에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위한 기관의 필요성을 느낀 애국지사들은 중국 상해에 모여 4월 11일 임시정부를 조직하기로 하고, 프랑스 조계(프랑스 치외법권 지역)에 기관을 두고 임시의정원을 구성했다. 

여기에 대의원 30명이 모여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 발표하고 4월 17일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관제를 발표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주요 인물로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등이 있다. 상해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국민당 총리인 손문의 호법정부에 임시정부를 승인 받고 한국유학생의 중구군관학교 수용 및 조차지에서 한국독립군을 양성 하는 등의 외교를 성공하였다. 

한성 정부
3월 초 이교헌, 윤이병, 윤용주 등 은 이규갑에게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하여 각 방면의 대표들이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 모여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들을 4월 23일 ‘국민대회’를 열어 임시정부 선포문과 국민대회 취지서, 결의사항, 각원 명단과 파리강화회의 대표, 그리고 6개조로 된 약법(約法)과 임시정부령 제1·2호를 발표하였다.

주요 인물로는 집정관총재 이승만, 국무총리총재 이동휘, 외무부총장 박용만, 내무부총장 이동녕 등이 있으며 한국의 독립을 설파하기 위한 파리강화회 참석 대표로 이승만·민찬호·안창호·박용만·이동휘·김규식·노백린 등을 선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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