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3.1 운동의 시작은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비폭력 독립운동이었지만 일제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이 운동의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이에 일제의 내각 수상 하라와 육군성은 3.1 운동의 무력 탄압을 지시했고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는 즉각 ‘가차 없이 엄중 처단한다’는 협박문을 발표한 후 곧바로 발포 명령을 내려 전국 각지에서는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일제는 2개의 사단을 ‘조선군’이라는 이름으로 주둔시키고 약 2만 명을 상주시켰다. 여기에 헌병대 7,978명, 경찰 5,412명 조선총독부 관리 2만 1천여 명 등 합계 5만 7천여 명의 인력이 3.1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이들은 평화적인 시위 군중에 일방적으로 발포를 하거나 시위 주동자를 구속한 경우 시위 군중이 구속한 인사들을 풀어달라고 일제 군경 주둔소에 행진을 했을 때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하게 발포하여 대량 학살을 자행하였다. 

일제의 무력 탄압은 3.1 운동이 도시에서 농촌으로 확산되던 시기에 가장 극심하였다. 특히 일제는 경기도 화성군(현재 화성시) 송산면의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마을 주민을 학살하였다. 또한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에서는 마을 주민을 교회에 모이게 한 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가둔 다음 불을 질러 타 죽게 하는 등 잔학한 학살을 자행하였다. 

일제의 무력탄압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약 7천 5백여 명이 피살되었고 1만 6천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4만 6천여 명이 체포되었다. 또한 715호의 민가와 49개소의 교회와 학교들이 불타버렸다.

그리고 체포된 인사들은 일본의 헌병들에게 온갖 악랄한 고문을 당해 엄청난 후유증을 앓거나 유관순 열사처럼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3.1 운동은 일본에게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단결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비폭력 운동에 맞서 무자비하게 무력 탄압을 하는 일제에게 여실한 한계를 느끼게 된 민중들은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일제 역시 국민들이 일제의 무단 통치에 불만을 느껴 3.1운동 같은 독립운동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 통치로 노선을 전환해야 했다. 이는 물리적인 폭압만으로는 우리 민족의 반일 투쟁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유화 정책으로 선로를 변경한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겉보기에만 유해졌을 뿐 한국인들을 감시, 탄압, 통제하는 정도는 더욱 교묘하고 은밀하게 강화되고 있었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