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지영 / 디자인 김민서] 1938년 11월 9일 밤, 독일 전역의 수많은 유대인들이 나치 대원들에 의해 맞고, 쫓기고, 약탈당했다. 거리에는 유대인 상점의 깨진 유리창 파편들이 반짝거리며 밤거리를 가득 메웠다. 잔혹했던 역사적 사건 속의 반짝거렸던 밤을 사람들은 ‘수정(水晶)의 밤’,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라고 부른다.

‘수정의 밤’은 1938년 11월 9일 나치 대원들이 독일 전역의 수 만개에 이르는 유대인 가게를 약탈하고 250여개에 달하는 유대교 사원에 방화를 일으켰던 날이다. 

이 사건의 발단은 독일 내 거주하고 있던 외국 출신 유대인들을 무조건 추방하라는 나치당의 조치에서 시작되었다. 1938년 3월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독일은 오스트리아에서 살고 있던 폴란드계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조치를 취하였다. 그렇게 이들은 모두 국경 너머로 내몰렸지만 폴란드 정부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소식을 접하게 된 프랑스 파리에 불법 체류하고 있던 17세 독일계 유대인 청년 ‘헤르셸 그린슈판’은 화를 참지 못하고 11월 7일,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의 3등 서기관이었던 ‘에른스트 폼 라트’를 권총으로 쏘아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린슈판은 체포되지만 이 사건은 곧 독일 전역으로 알려지게 됐고, 이에 11월 8일부터 독일 전국적으로 유대인 회당과 상가, 자택에 대한 무분별한 테러 행위가 발발했고 갈수록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한다. 

또한 이 사태를 키운 장본인은 히틀러를 대신해 성명을 발표한 사람 ‘요제프 괴벨스’인데, 그는 “히틀러가 시위는 허가하지 않았지만, 자연발생적인 분노의 표출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하며 사태가 더 커지게 됐다. 

이를 신호탄으로 유대인 사회에 대한 전국적인 폭동이 시작되었다. 돌격대, 친위대 등 나치 단체의 회원들이 유대인 소유의 상점과 예배당에 대대적인 방화와 약탈을 자행해 유대인 3만 여 명 이상이 체포당했다. 이 학살은 11월 9일 밤부터 10일 새벽 사이에 일어난 학살이었다. 

'수정의 밤'을 시작으로 나치 대원들의 유대인 말살정책이 현실화되었다. 하지만 언론과 지식인들은 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당시 유대인은 독일 인구의 3% 정도밖에 안됐는데, 나라의 전체 부(富) 중 4분의1을 차지했던 유대인을 밉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 때 반유대주의에 가담하지 않고 유대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려 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독일 전역의 유대인 박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로부터 시간이 지난 지금, 세계는 나치의 역사를 비판했고 당사국인 독일 또한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반성과 사죄를 표했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은 현재를 돌아보게 하고 그러한 우범을 다시 저지르지 않게 하는 지표로서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때의 탄압은 현재에서도 언론·노동 탄압 등 다른 형태로 자행되고 있다. 이 세상이 권력자들에 의해 단일화 되는 것이 아닌 다양성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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