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한국인의 미주 이전은 미국에서 온 선교사 호레스 알렌에 의해 시작되었다. 알렌은 파업을 일삼고 게으른 일본과 중국인 노동자들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는 사탕재배 농장주들에게 조선 노동자들의 근면 성실함을 강조하고 가필드 대통령과 고종을 설득시켜 하와이노동이민을 허락하게 하였다. 

1902년 11월 궁내부 내에는 하와이 이민전담기관인 ‘수민원’이 설치되어 1902년 12월 22일 최초의 이민자들이 사탕수수농장의 노동자 자격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일제에 의하여 하와이 이민이 금지될 때가지(1905) 7,226명이 하와이로 갈 수 있었다. 이들은 농장 단위로 동회를 조직하였고 친목도모와 권익 보호, 정치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 운동단체들을 결성하였다. 

1903년 8월 7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홍승하, 윤병구 등의 발기로 최초의 정치단체인 신민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미주에 거주하고 있던 민족 운동가들은 파리강화회의(1919)에 주목하고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이 회의는 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의 연합국이 전쟁의 뒤처리를 하기 위해 열린 회의였다. 특히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장한 민족 자결주의(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와 집단 안전 보장의 원칙은 일제에 주권을 침해당한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간절하고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이에 국민회에서는 이승만과 정한경, 민찬호 3인을 선정하여 이 회의에 참석시키려 하였는데 여권 발급을 거부당하며 좌절당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이 과정에서 윌슨 대통령에게 위임통청원서(1919.3.3.)를 제출하게 되었는데  

1. 열강(미국)은 조선을 일본의 학정에서 구출할 것
2. 열강은 장래 조선의 완전 독립을 보증할 것
3. 조선을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하에 둘 것 
등 30개조의 내용을 담았다. 

해당 청원서는 민족 자결주의에 입각해 조선을 독립해보겠다는 의도를 담았지만 승전국들이 말하는 민족 자결주의는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해방시켜 힘을 약화시키는 내용이었기에 연합군에 포함되어 있던 일본과는 관련이 없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승만은 이 청원서로 인해 신채호 등 자치 독립을 추구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미국에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승만은 미국 워싱턴에 설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사무소로 서재필이 운영하던 한국통신부와 주 파리위원회를 흡수하여 구미위원부(1919.5)로 개편하였다. 영문 월간지 한국평론을 발행하여 일제의 침략을 고발하기도 했지만 구체적인 외교성과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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