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정광윤]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과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를 둘러싼 여-야 간의 대치가 심상치 않다. 급기야 ‘막말’ 공방으로 비화되고 있다. 우리 정치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에도 힘이 부치는데, ‘과거의 덫’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작금의 대치 정국은 비교적 최근에 발단된 것이지만, 그 저변에는 대한민국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요컨대 좌-우 진영 간의 경험과 가치가 정면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혹은 좌파) 진영은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의혹과 대화록 공개를 용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국가정보원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것 같지는 않지만, 도저히 질 수 없는 게임에서 패배를 자초한 진보 진영으로서는 이것을 빌미로 대선에 불복하고 싶은 심정일 터이다.

   대화록 공개는 더 반발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표면적으로는 궁지에 몰린 국가정보원이 조직의 보위를 위해 국익에 반하는 결정을 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지만, 내심으로는 대화록 내용이 공개될 경우(이미 많이 공개되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예는 물론, 야권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작금의 정국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고, 극언까지 터져 나오고 있는 형국이다.

   게다가 진보 진영에게 국가정보원은 어떤 존재인가? 민주화 운동권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진보 진영이기에 국가정보원을 곱게 보아 줄 리가 만무하다. 민주화 운동 시절, 민주화 인사들을 탄압한 장본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도 10년 동안 집권하면서 국가정보원을 정권 안보에 활용했음에도 야당으로 변신한 지금에서는 그 때의 좋지 못한 기억을 더 많이 떠올리기 십상이다. 말하자면 내용을 떠나 국가정보원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더 더욱 기분 나쁘고 용납하기가 어렵다.

   나아가 대화록의 핵심 내용에 대한 진영 간의 현격한 시각 차이야말로 대한민국 현대사를 그대로 압축해 주고 있다. 보수(우파) 진영의 입장에서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나눈 대화 내용에 대해 대단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북방한계선(NLL)을 포기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김정일 위원장의 비위를 맞추려는 태도를 취했다는 분위기이다. 벌써 이 진영의 대표 논객이 『노무현-김정일 대화록 전문(全文)과 해설』이라는 책을 발 빠르게 펴냈다.

   반면에 진보 진영은 대화록 어디에 NLL 포기 대목이 있느냐고 반발하고 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 때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 의원은 대화록 전문을 공개하자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자신 있다는 말이다. 지난번 언론에 보도된 대화록 개요와 전문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은 내용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 귀결된다. 진영의 자존심이 걸려 있어 각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가치와 이념이 서로 현격히 다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안보를 중시하고 북한 체제를 ‘악의 축’으로 보는 보수 진영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 하나하나가 국가 안보를 저해하고 북한 체제를 미화하는 내용이었다고 보는 편이다. 앞서 소개한 보수 논객의 책 광고문에서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았다면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의 대통령(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계에서 가장 실패한 집단의 수괴(김정일 위원장)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가 있나?”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거친 표현이지만 보수 진영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러나 민족주의와 한반도의 평화를 추구하는 진보 진영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화 내용이 이에 부합한다고 믿고 있다. NLL만 하더라도, 상호 논란이 있는 상황에서 공동어로구역 혹은 평화지대로 설정하자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는 반문이다. 북한의 주장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검토하고 수용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NLL 때문에 그동안 많은 분쟁이 있었으니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이것 말고 있느냐는 식이다. 대한민국과 일본 간에 첨예하게 맞서 있는 독도 문제에 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해법과 비슷한 맥락이다.

   진보 진영의 문제의식은 겉으로는 그럴 듯하다.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변경(邊境)’에 대한 해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북 관계의 특수성과 북한 정권의 호전성에 비추어 볼 때 지나치게 순진한(naive) 구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우리 국민들 중에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에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나쁜 의도에서 그런 발언들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NLL을 떠나 전반적인 대화 내용과 태도가 우리 국민들의 정서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북송검특검법안에 대한 서명과 이라크 파병 결정으로 진보 진영의 근본주의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었다. 그럼에도 남북정상회담에서 의외(?)의 발언들을 한 것은 진보 진영의 정서를 마냥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청와대 안에는 386운동권 출신들이 보좌를 하고 있어 이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정상회담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면서 임기 종료를 앞둔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서는 민족주의와 평화주의라는 그럴 듯한 감상에 치우쳐 오판했을 가능성도 있다. 요컨대 동기의 순수성은 있었는지 몰라도 궁극적으로 ‘특정 진영의 지도자’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노무현 정부는 끝났고 노 전 대통령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현재진행형인 것은 민주당 등 진보 진영이 대화록에서 드러난 내용을 그대로 계승할지의 여부가 앞으로의 정치적 선택에서 중요한 기준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친노 계열의 입장에서는 양보할 수 없는 생명선이기도 하다. 대화록에 대한 공방이 치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정치권이 치고받고 하지 않더라도 우리 국민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우리 국민들은 진영마다 갖고 있는 상이한 대북 정책을 구사해 왔음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작년 대통령 선거는 진보 진영의 승리가 관측되었지만,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승리를 움켜쥔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많은 이들이 동의하듯이 50대와 60대의 높은 투표율이 당초의 예상을 뒤집었다. 왜 50대와 60대가 대거 투표장으로 집결했는가? 민주당 등 진보 진영의 비합리성과 불안정성 때문이 아니었던가! 근본적인 좌파 민족주의 성향을 갖고 있던 이정희 후보가 가세함으로써 이런 효과는 더욱 증폭되었다. 물론 제19대 총선에서의 ‘막말 파문’과 친노 계열의 득세도 유권자들의 표심을 움직이는 데 작지 않은 요인이었다.

   그래서 민주당은 대선 패배 이후 노선의 재정립 등 당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마침 비주류인 김한길 대표 체제를 등장시킴으로써 이런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기대되었다. 민주당 당원들 중에서도 자충수를 두는 언행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기대가 현실화될 것으로 믿은 국민들이 많았다. 그렇지 않아도 안철수 의원이 원내에 진입했기 때문에 민주당이 야권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도 국민 정당으로서의 행보가 불가피했다.

   하지만 이런 로드맵은 대치 정국 때문에 무산될 공산이 커졌다. 또다시 강경파들이 득세를 할 조짐이다. 친노 계열과 운동권 출신들이 전면에 나설 만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민주당의 개혁은 지연될 수밖에 없고, 뉴 페이스는 더 더욱 기대 난망이다. 그리고 민주당의 일부 의원들이 막말 퍼레이드까지 벌여 그 기반을 스스로 허물고 있다. 이에 따라 반사적으로 안철수 의원의 입지만 넓어지고 있다. 안철수 의원이 민주당의 책임론을 거론한 것 자체가 민주당이 처한 사정을 방증하고 있다. 대치 정국이 장기화될수록 민주당에 크게 득이 될 것 같지는 않다는 말이다.

   보수 진영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 내용을 지나치게 이용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국정에 무한 책임을 지고 있는 집권 세력으로서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상당수의 우리 국민들은 진보 진영의 무분별한 민족주의 혹은 평화주의에 대해 공감을 하고 있지 않지만, 보수 진영의 냉전적 태도에 대해서도 신물이 나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게다가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의혹 사건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는’ 오해를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반도는 냉전 시대의 유일한 섬이다. 분단 자체가 이데올로기의 충돌에 따른 산물이고, 남남 갈등 역시 그렇기 때문에 민족 통합의 지름길은 낡은 이데올로기를 혁파하는 일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비정상적인 북한 체제에 대한 변혁의 필요성은 말할 것이 없지만,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이념에 사로잡혀 이를 감싸는 대한민국 진보 일각의 행태 역시 시대착오적이다. 민주당이 다시 집권을 하기 위해서는 이런 종파와 결별해야 한다. 무원칙한 야권 연대가 작년의 대선 패배를 초래했다는 점을 뼈저린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수 진영 역시 시대착오적인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국가 안보는 당연히 소중한 가치이지만, 상대 진영의 주장 가운데 ‘합리적 핵심’에 대해서는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리라. 그래서 남남 갈등을 극복하는 데 보수 진영이 앞장서야 한다. 이념으로 먹고 살기 쉬운 진보 진영의 변화는 오히려 보수 진영의 그것보다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진보 진영의 언사에 즉자적(卽自的)으로 대응하지 말고 의연하게 정국의 정상화를 도모해야 한다. 우선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의혹 국정조사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국가정보원의 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를 계기로 더 이상의 소모전을 펼치지 않도록 정부-여당이 솔선수범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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