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정광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권력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이 있었기에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민주주의를 구가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특히 근대 민주주의는 청교도 혁명, 프랑스 혁명 등 기존 질서를 혁파한 대변혁을 통해 정립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 역사도 서구 못지않게 치열했다. 26년 전인 1987년의 6월 항쟁은 군부 정치를 사실상 끝장내는 거대한 변곡점이었다. 지구상에 철권통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국가들이 적지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대한민국이 민주 국가의 반열에 올라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온전한 의미의 민주 국가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과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최근에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혐의로 검찰에 의해 기소된 일이 있었다. 그 정확한 진상은 재판에 의해 가려지겠지만, 국가정보기관의 전직 수장(首長)이 검찰 청사를 드나드는 일 자체가 불미스럽기 짝이 없다. 원세훈 전 원장이 아니더라도 민주화 이후 역대 정부 고위 공직자들의 권력 남용 행위는 끊이지 않았다. 행정부뿐만 아니라 입법부와 사법부 역시 국민의 권력을 사유화하는 현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중대한 걸림돌이다.

   요컨대 ‘대의 민주주의의 딜레마’이다. 아직까지는 대의 민주주의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국민으로부터 주권을 위임받은 선출직과 임명직 공직자들이 그 본분을 망각한 채 국민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임무를 수행할 때 따르는 모순은 굳이 긴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국민의 혈세로 조성되는 국가 재정이 효율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낭비성 경향이 지대한 현실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와 정치가 아님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박근혜 정부가 정부 재정의 낭비 요인을 제거함으로써 늘어나는 재정 수요에 대처하겠다는 발상은 대단히 시의적절하다.
여기에 정치 과정에서의 고비용-저효율 구조 역시 민주주의 발전에 저해 요인이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주요 정당들에게 국고보조금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국민의 부담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과거에 비해서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대표자를 선출하는 데 많은 비용이 수반되는 구조가 지속됨으로써 양질의 인재들이 선거 참여를 꺼리는 풍토이다. 그래서 재력가 혹은 기득권자들이 국회와 정당을 지배하는 이른바 ‘부르주아 민주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형국이다. 달리 표현하면, ‘1인 1표’가 아니라 ‘1원 1표’의 민주주의인 것이다. 적어도 국민의 신성한 주권이 왜곡되고 있는 현실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보수도, 진보도 자유롭지 못하다.

   ‘안철수 현상’은 이런 배경에서 등장했다. 현 시점에서 볼 때, 안철수 의원을 통한 새 정치에 대한 열망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다만, 안철수 식의 새 정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략과 로드맵은 어떤 것인지를 제시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새 정치를 담을 그릇이 필요한데, 과연 기존 거대 정당과 구별되는 세력을 형성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안 의원은 지난 4월 보궐선거를 통해 원내에 진입한 만큼, 이제는 보다 책임 있는 정치 지도자로서의 행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존 정당에 대한 원론적 수준의 비판으로는 국민 대중의 지지를 계속 받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자신이 이끄는 정치 세력이 지식정보 시대에 알맞은 새로운 대안임을 인정받을 수 있는 형식과 내용을 갖추어야 하리라.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는 국민의 ‘삶의 질’ 개선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의사 결정 과정에서의 절차적 정당성도 민주주의의 주요 요소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가 국민의 행복에 이바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시민적 기본권, 정치적 기본권과 더불어 사회경제적 기본권이 중요한 까닭이다. 바꾸어 말해서 삼권분립이 잘 구현되고, 국가 권력으로부터 시민의 자유가 보장되며, 유권자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폭넓게 행사된다 하더라도 다수 국민들의 삶이 피폐하다면 그것은 ‘절반의 민주주의’에 불과할 따름이다. 오늘날처럼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우며, 계층 간 격차가 심화되는 조건에서 민주주의는 공허해지기 십상이다. 미국 제32대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velt)가 했던 “개인의 진정한 자유는 경제적 안정과 자립 없이는 불가능하다.”라는 말을 상기하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이런 맥락에서 우리 헌법에서도 명시하고 있는 ‘경제 민주화’가 단순히 재벌 개혁에 멈출 수 없음을 의미한다. 주지하듯이 시장경제는 인간의 욕망과 경쟁심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체제이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실패에서 입증되었듯이 인류 역사에서 시장경제 체제가 가장 우월하다는 데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는 바이다. 문제는 경쟁의 과정이 지나치게 치열하고 그 결과에 대한 보정이 미흡하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국가들이 시장경제와 더불어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이유이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당연히 내용으로서의 민주주의를 함의한다. 즉 국민의 생활 조건이 개선되고, 국가의 부(富)가 비교적 골고루 퍼지는 데 민주주의가 본질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서두에서도 시사했듯이, 민주주의는 헌법과 법률의 규정만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주권자인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분투할 때 발전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 우리 국민들의 민주주의 수준은 많이 향상되었다. 권리 의식이 강하고, 권력자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예리한 편이다. 각종 정보를 많이 접하는 시대라서 권력자들의 실수나 과오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무를 포함하는 시민정신은 여전히 미약한 편이다. 법질서에 대한 경시 풍조도 남아 있고, 납세자로서의 의무를 이행하는 데도 미흡하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지역주의, 금권정치 등 낡은 정치 질서에 일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는 시민들의 행동이 중대한 시점이다.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소극적 수준을 넘어 서서 올바른 국가 공동체를 만든다는 차원에서 각계 시민들의 운동이 절실한 것이다. 이 운동은 자기 개혁을 내포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대의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것은 각계 시민들의 활발한 참여인데, 참여의 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참여의 질이다. 시민운동을 저항형, 협력형, 창조형으로 나눈다고 할 때, 당연히 창조형 시민운동이 활발히 전개될 필요가 있다.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에는 익숙하지만, 뭔가 새로운 생산적인 걸 만드는 데는 소극적인 풍조를 개선할 시점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대표적인 보수주의 정치가였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변화의 수단이 없는 국가는 보존의 수단을 갖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라고 말했다. 이 보수주의자조차 변화를 역설했다. 민주주의의 강점은 그 개방성과 다원성에 있다고 믿고 싶다. 거대한 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26년을 맞는 시점에서, 우리는 오늘날 구가하고 있는 민주 질서에 만족하기보다는 더 나은 민주 사회를 향하여 더욱 분발해야 하리라. 엊그제 진보정의당 심상정 대표가 국회 비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진보의 자기반성을 역설했는데, 보수 역시 마찬가지의 각성이 필요하다. 어쩌면 대한민국은 ‘1987년 체제’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적으로 그 시절에 온 국민들이 목소리 높여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 혹은 대통령중심제가 과연 최선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질적 심화를 위한 다방면의 활동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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