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일제는 일본인 관리의 대한제국 정부의 차관 임명과 통감부의 내정을 직접 지배하는 신한일협약(1907년 7월 24일)을 통해 대한제국의 주권을 성공적으로 침탈하고 있었고 대한제국은 그저 목숨만 연명하고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7월 22일에는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까지 통감부에 이양하였고 7월 24일에는 신문지법을 제정해 언론을 탄압했다. 또한 7월 27일에는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광무보안법을 제정하였고 7월 31일 대한제국 군부폐지와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여 대한제국을 삼키는 과정에서 일제를 방해할 만한 요소들을 모조리 다 치워버렸다.

일제의 강행에 백성들은 엄청난 분노를 표했고 특히 군인들은 해산에 반발하여 일본군과의 교전 끝에 1904년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의병에 합류, 항일의병무장투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이러 인해 일본의 한국 수탈은 약간의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하지만 의병의 규모와 활동이 제어하기 힘들 정도가 되자 일제는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1909년 9월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일제의 감시와 압박 때문에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은 점차 어려워졌고 때문에 민족운동자들은 일제의 손길이 덜 닿는 시베리아나 만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1909년 12월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이 저격하여 민족의 한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줬으나 큰 맥락은 달라지지 않았다.

일제는 1910년 5월 30일 육군대장 출신 육군대신 데라우치(寺內正毅)를 통감으로 겸직하게 하였고 6월 24일 한국 경찰사무를 완전히 위탁하는 협정을 체결한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은 군대에 이어 경찰관제까지 폐지가 되었고 통감부가 경무총감부를 설치하여 일반경찰권까지 완전히 장악, 헌병경찰제를 시작하여 전국 각지에 배치하여 어떤 반항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1910년 8월 16일, 데라우치는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였고 22일 이완용은 합병조약을 조인함으로써 한국은 36년에 걸친 치욕의 시기인 일제 강점기에 돌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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