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승재 / 디자인 이정선 pro] 어린아이가 부르는 동요에서부터 애국가까지 무궁화가 우리나라의 꽃이라 나와 있을 만큼 무궁화가 우리나라의 꽃이라는 것은 남녀노소가 알고 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우리나라의 국화로 알려져 있는 무궁화. 하지만 왜 무궁화가 어떤 꽃인지, 그리고 진짜 우리나라 국화인지는 아직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무궁화의 학명은 ‘Hibiscus Syriacus L’이다. 앞에 나온 Hibiscus는 무궁화가 이집트의 신 히비스(Hibis)를 닮았다는 뜻으로 그만큼 아름답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Syriacus는 무궁화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원산지를 시리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실제로 무궁화의 원산지는 시리아가 아닌 중국이라고 한다.

신을 닮았다 할 만큼 아름다운 무궁화는 7월에서 9월, 초여름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아침에 꽃이 피고 저녁에는 꽃송이가 지는데 약 100일 동안 한 나무에서 여러 꽃송이가 번갈아 꽃을 피운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무궁화는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있는데, 이 색깔별로 이름을 달리 갖는다. 새하얀 꽃은 배달계, 흰 꽃잎과 붉은 심은 백단심계라 부르며 분홍빛 꽃은 아사달계, 붉은색 꽃은 적단심계, 자단심계라 부른다. 또 청색 꽃은 청단심계라 칭한다.

그렇다면 무궁화는 어떻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꽃이 되었을까? 옛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에는 무궁화가 굉장히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단군조선시대에는 무궁화를 환화, 천지화, 훈화, 근수 등이라 불렀고, 이 꽃을 신성하게 여겨 제사를 지내는 신단 주변에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신라 시대 당시 쓰인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낸 국서 <사불허북국거상표>에서는 신라를 근화향(槿化鄕), 무궁화가 있는 나라로 칭했고 조선 세조 때 쓰인 원예서 양화소록에서는 우리나라를 무궁화의 나라로 기록하기도 했다. 그리고 광해군 당시 허균이 쓴 시 <대야통포류>에서도 조선을 근원(槿原), 혹은 근역(槿域)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무궁화가 국화로 본격적으로 거론된 시기는 ‘구한말 개화기’이다. 갑오개혁 이후, 신문화가 유입되자 지식인이었던 남궁억, 윤치호 등은 민족의 자긍심을 위해 ‘국화’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이 때 무궁화를 국화로 하자고 결의를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곧 이어 만들어진 애국가 후렴에도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가사가 정해지면서 명실항부한 우리나라의 국화로 인정받게 됐다. 

이렇게 정해진 무궁화는 한일합병 전후로 일본의 상징인 벚꽃에 대항하기 위한 민족의 상징화로 자리 잡게 됐다. 이에 일본은 우리 민족과 조국을 뜻하는 무궁화를 무자비로 베어가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의 만행에도 우리는 꾸준히 무궁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특히 최초의 무궁화 연구자 류달영 박사는 무궁화를 수집하고 외국 품종을 들여와 우리나라만의 무궁화를 육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무궁화를 공식 국화로 인정할 수 없다는 논란도 계속 이어져 왔다. 법률상 정한 적이 없고, 대부분의 무궁화가 외래종이라는 이유들이, 또 진딧물이 많아 지저분하고 키우기 힘들다는 등 다양한 이유들이 제기 된다. 이에 무궁화를 국화로 지정하기 위한 법률이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며, 국립생물자원관은 무궁화 속 식물 중 유일한 우리나라 자생종인 ‘황근’을 보급, 육성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단군조선부터 반만년의 역사를 함께 해 온, 무궁화. 민족의 아픔과 고난을 함께한 무궁화는 우리들 마음속에는 이미 진정한 국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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