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지영]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그동안은 잊고 살았다고 해도 이때만큼은 나라를 위해 싸웠던 분들을 기리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시간을 잠시라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인터뷰360은 6·25 전쟁에 참전한 유공자 ‘김성렬’ 어르신을 만나 당시 전쟁에 대해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PART1. 서울의 폐허된 광경이 슬퍼 입대하게 된 ‘중학교 3학년 소년’

-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저는 김성렬입니다.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1동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 6.25 참전 당시 나이가 어떻게 되셨나요?

그러니까 50년 6월 25일 북한이 불법 남침을 했을 당시에 제 나이는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김포에 살고 있었습니다. 남침 소식을 듣고 인천으로 피신해 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에 젊은이들을 북으로 끌고 간다는 소문이 돌아서 숨어서 지냈어요.

- 당시 상황이 어땠었나요?

난생 처음 보는 전투기들이 날아다녔습니다. 인천 월미도 앞바다에서는 미국 함선의 함포가 늘 불을 뿜었죠. 포가 떨어진 곳에는 집채만한 구덩이도 생겼습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는 포탄이 비 오듯이 쏟아졌습니다. 그러고 얼마 안 돼 김포가 점령당했어요. 그리고 서울을 다시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 그럼 군 입대는 언제 하신 건가요?

서울을 다시 찾았다는 소식에 서울에 있는 친척이 걱정됐습니다. 그래서 서울을 갔는데 그곳이 전부 다 건축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아주 잿더미로 되어 있었어요. 학교도 다 문을 닫고 폐교가 되다시피 했죠. 그때 서울의 폐허된 광경을 보고 무척 슬퍼하면서도 북한군에 대해 적괴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원해서 군대에 입대하게 됐습니다. 그것이 50년 10월 15일입니다.

- 당시 어떤 마음으로 전쟁에 임하신 건가요?

그때 입대할 당시에 아군이 38선을 넘어서 북침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고 전상자가 많이 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해서 대한민국을 지켜내야겠다는 그런 심정으로 임했습니다.

-입대하자마자 바로 전쟁에 투입되신 거세요?

자원입대를 하고 서울에서 3일 만에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군입대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훈련은 아주 짧게 받았습니다. 1951년 3월에 부산에서 위생병 교육을 받은 뒤 전쟁에 투입됐습니다.

- 어디서 군 생활을 하셨나요?

그때 제가 훈련을 받고 보병 제7사단 의무대대 치료중대에 51년 3월 15일에 배치가 되어 군인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7사단은 강원도 평창군 대화리에 있었습니다.

- 군 생활을 어떻게 하셨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7사단 의무대대 전방 응급치료 수용중대에 복무하면서 많은 전상자 장병을 응급처치 했습니다. 그때 전방에서 전투를 할 때 전사자가 많이 나왔어요. 저희 골목이 다른 부대도 그 골목을 통과해야지만이 나가요. 그래서 환자들을 거기서 모두 응급처치를 했어요.

응급처치를 하는데 출혈을 많이 한 분은 인사불성이 돼서 눈을 못 뜨고 있어요. 맥도 아주 희미하고. 그때 정맥주사를 놓아요. 그러면 반도 안 들어가서 눈을 뜨기 시작해요. 그러고 그 환자가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요. 그때 기분이 아주 상쾌하죠. 정신을 못 차리던 사람이 깨어나니 기분도 좋으면서 기쁘고 한편으로는 슬픈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나기도 해요.

중환자들은 사단 고무관실로 긴급 후송을 요청하면 5분도 안 돼서 헬리콥터가 날아와요. 그러면 표식을 알리기 위해서 연막탄을 던져요. 그걸 보고 헬리콥터가 내리면 중환자를 싣고 후방 야전병원으로 후송해서 치료를 더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치 어제 일어났던 일인 것처럼 생생히 그리고 정확히 당시 전쟁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 김성렬 어르신. Part2에서 못다한 6·25 전쟁 이야기와 어르신이 지금을 살고 있는 세대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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