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더 이상 대한제국을 일제에 병합시키는 데에 거리낄 것이 없게 되었다. 가쓰라 테프트 밀약으로 미국에게서 묵인을 약속 받았고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시아가 대한제국에 간섭할 수 없도록 했다. 또한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열강에게도 이해관계를 통해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을 묵인하도록 조처 한 후 1905년 11월 고종과 대신을 겁박하여 외교권과 통치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고종은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손을 놓고 바라만 보았지만 이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친서를 국외로 내보내기 위해 노력을 하기 시작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기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 고종에게 커다란 기회가 생겼다. 1906년 6월 평화회의의 주창자인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Nicholas Ⅱ)가 고종에게 제2회 만국평화회의의 초청장을 극비리에 보내 온 것이다. 고종은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조약이 무효인 것을 주장하고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을 폭로하기 위해 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게 된다.
 
파견된 헤이그 특사는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검사 이준과 주로한국공사관 참서관 이었던 이위종 등 3인이었다.
 
세 특사는 1907년 6월 중순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현 상 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들의 목표는 일제의 한국 침략상과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여 열강들의 공감 및 후원을 얻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의 대표 자격으로 공식 참석을 해 발언권을 얻어야 했는데 도움을 청한 러시아대표 넬리도프 백작은 러시아가 몰래 초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담스러워 해 초청국 네덜란드에 책임을 미뤘다. 하지만 네덜란드 측은 이미 열강들이 을사조약을 승인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정부의 자주적인 외교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참석권도, 발언권도 얻지 못하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이 같은 입장은 다른 열강들(이미 승인을 했으니)도 마찬가지여서 특사들의 평화회의에서의 폭로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공식적인 루트에서 막혀버린 특사들은 비공식적인 방법이라도 써야 했다. 이들은 일제의 만행과 한국의 입장을 담은 공고사를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비공식적인 경로로 보냈고 전문을 평화회의보에 발표했다. 또한 7월 9일에는 영국의 언론인 스테드(Stead, W. T.)가 주관하는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참석하여 발언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위종은 이 협회에서 한국의 사정을 알리고 주권을 회복의 원조를 청하는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를 프랑스어로 발표해 세계의 언론인들에게 깊은 공감을 사 여러 언론에 대서특필 되는 성과를 얻게 된다.
 
그러던 와중 회의에 참석되지 못해 억울하고 비통함을 가졌던 이준은 결국 7월 14일 급작스럽게 순국하였고 남은 특사들은 만국평화회의가 끝난 뒤에도 구미 각국을 순방하면서 국권 회복을 위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비록 공식 석상에서는 모두 거부되어 표면적으로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 모양새를 갖춘 헤이그 특사는 대한제국이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과 을사조약이 무효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렸다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일제가 이를 가만두고 볼 리가 없었다. 이런 헤이그 특사들의 활동이 이토 히로부미 통감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1907년 7월 20일 고종에게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퇴위시키고 순종을 등극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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