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승재 / 디자인 이연선 pro]

▶ 체 게바라 (Che. Guevara)
▶ 출생-사망 / 1928년 6월 14일 ~ 1967년 10월 9일
▶ 국적 / 아르헨티나
▶ 활동분야 / 정치
▶ 주요저서 / <게릴라 전쟁>, <혁명전쟁 여행>, <라틴 여행일기>, <체의 일기> 등

아르헨티나 출신의 쿠바 정치가이자 혁명가로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 혁명에 가담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민중 혁명을 싸우던 그는 볼리비아에서 사망했다.

- 진보적 성향을 가진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다

체 게바라는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의 로사리오에서 태어났다. 체 게바라의 집은 로사리오의 중상류층 백인 가정이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백인 상류층들이 풍요를 누리고, 노동자와 농민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아버지였던 에르네스토 게바라와 어머니 셀리아 데 라 세르나는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특히 어머니는 문학과 사상에 열정이 높아 집안에 많은 책을 가지고 있었고, 예술가와 지식인들과의 교류도 많았다. 체 게바라가 사회주의 운동을 함에 있어서 어릴 적의 시대적 상황과 부모님의 진보적 성향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 자유주의 정권의 몰락과 카스트로와의 만남

25살의 체 게바라는 의학 박사 학위를 땄지만,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진보정권을 이뤄 자유로운 분위기가 가득하던 과테말라로 떠나게 된다. 하지만 민주 선거로 이룬 과테말라의 진보 정권이 미국 자본의 지원을 받은 세력의 쿠데타로 인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체 게바라는 남미 민중을 위한 진정한 혁명은 비폭력적 개혁이 아닌 무력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과테말라에서 독재정권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된 체 게바라는 멕시코로 망명을 하게 됐고, 그곳에서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후부터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 해방 운동에 동참을 하게 됐다.

-쿠바 혁명의 성공과 쿠바 정권의 기초를 다지다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의 비밀 결사대에 군의관 자격으로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점차 그의 인품과 지도력을 인정받으며 그의 영향력은 커져만 갔다. 그래서 1957년에는 반군부대 대장을 맡아 쿠바 바티스타 정부군과 싸웠다. 1959년 마침내 쿠바 혁명이 성공하게 됐고,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게 되자 리카바니아 요새 사령관, 국가토지개혁위원회 위원장, 중앙은행 총재, 공업 장관 등을 역임하며 쿠바 정권의 기초를 세워 나갔다.

-미국과의 대결과 피델 카스트로와의 결별

쿠바가 사회주의 혁명군에 점령되자 위기를 느낀 미국은 1961년 미국을 침공했다. 쿠바는 미국의 군사적 공격은 막아냈지만, 미국에 의해 경제 봉쇄를 당하게 됐다. 이 때 체 게바라는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경제적인 지원과 무기 원조를 받아내는 성과를 얻지만 소련은 미국과의 협상으로 쿠바 지원을 철회하게 된다. 이에 체 게바라는 소련을 더 이상 사회주의 혁명을 지원하는 종주국이 아님을 밝히고, 쿠바에서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을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확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1965년 피델 카스트로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유지하는 쪽을 선택했고, 이에 반대했던 체 게바라는 카스트로와 결별하게 된다.

-아프리카의 사회주의 혁명 지원, 그리고 혁명가의 죽음

1965년 쿠바를 떠난 체 게바라는 혁명 게릴라들의 국제주의 전선의 형성을 위해 아프리카 콩고로 떠난다. 그는 콩고에서 게릴라 부대를 훈련시키고 동지들과 함께 게릴라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혁명 연합은 와해돼버렸고, 콩고 좌파세력이 쿠바인들의 철수를 요구해 성과 없이 쿠바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쿠바에 돌아온 이후에도 볼리비아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게릴라 요원을 훈련시켰고, 1966년 볼리비아에 직접 잠입하게 된다. 그렇게 게릴라 부대를 이용한 군사 활동에 전념했던 체 게바라는 1967년 10월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다 총상을 입고 생포됐다. 그리고 그는 그 다음날 바로 총살을 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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