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정광윤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65년이 넘었습니다만, 이 기간 동안 실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특히 국제 사회에서의 위상이란 점에서는 경천동지의 대격변이 있었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작금의 세계 체제로부터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국가가 대한민국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역사의 순방향을 향해 달려 왔습니다. 그런데 유독 ‘변화의 무풍지대’에 있는 분야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교육입니다. 물론, 대한민국의 근대화 과정에 교육이 일조를 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산업화 시대에 유용했던 교육 패러다임은 이제 더 이상 통용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국가 경쟁력을 좀먹는 구시대의 유물일 뿐임을 우리는 명쾌하게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교육은 한마디로 ‘혁신(innovation)’보다는 ‘모방(immitation)’에 치우쳤던 시대에 적합한 교육입니다. 그리고 표준화 혹은 획일화를 추구했던 제2물결 시대에 필요한 인력을 양산하는 교육입니다. 말하자면 시대정신과 교육 형태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국가 발전에 필요한 인재들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대한민국의 근대화는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교육은 세계화-지식정보화-다원화라는 새로운 시대 환경이 펼쳐지고 있는 와중에서도 낡은 모습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서열화는 있을지언정 획일적인 피교육자를 양산하고, 수십 년 전의 주입식 교육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교육비 부담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기만 해, 가정 경제가 휘청거릴 지경입니다.

   신기한 것은, 사교육 시장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교육을 고칠 엄두조차 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입시 학원이나 사교육 기업들은 학교를 비롯한 공교육 체제의 틈새를 교묘히 파고들어 어떤 제도적 여건에서도 사교육의 파이를 키우는 데 성공하고 있는 데 비해, 교육 당국이나 학교는 사교육 시장에 끌려 다닐 만큼 무기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아가서는 사교육 시장이 학생들을 끌어들이는 주요 지렛대로 삼고 있는 ‘선행 학습’에 학교가 좇아가는 양상입니다. 그래서 초등학교나 중학교마저 학원을 다니지 않으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의 시험 문제를 풀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습니다. 가히 사교육 업체들을 위한 교육,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대한민국 교육의 현주소입니다.

   요컨대, 대한민국 교육은 1퍼센트를 위해 99퍼센트가 들러리 서는 교육에 다름 아닙니다. 그 1퍼센트가 앞서 말한 대로 창의적인 인재인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민주 시민으로서의 소양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학교의 현실에서 왜 우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입니다. 학교는 단순한 지식과 정보를 배우는 곳이 아닙니다. 단순 지식과 정보에 대해서는 인터넷을 통해 더 잘 터득할 수 있는 시대에서 살고 있습니다. 학교는 공동체 정신을 배우는 곳이고, 다양한 생각들을 교류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억지춘향식의 단순 정보를 일방적으로 주입받는 곳이어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학생 개개인의 인격과 개성마저 무시하고, 끝없이 우등과 열등으로 분열시키는 학교 현실에서 우리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고 느끼겠습니까?

   언론이, 학교가, 교육 당국이 이런 절망적인 교육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것은 아닙니다만, 이 낡은 교육을 혁파하기 위해서는 그런 정도의 관심과 열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과 정부가 중장기적인 로드맵을 갖고 교육 혁신에 나서야 합니다. 여러 가지 환경적인 난관이 있겠습니다만, 대통령과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교육 혁신의 길이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교육을 반드시 살리겠다는 열정이고, 올바른 교육의 길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육은 정치 세력끼리 수월성 교육이냐 평등성 교육이냐를 놓고 싸워 왔습니다. 이 논쟁은 의미가 없습니다. 창의성 교육, 개성 교육, 인간성 교육이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사교육이 사라질 정도로 공교육을 정상화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일어난 대한민국이 왜 교육 문제에는 이렇게 무력합니까? 여러 가지 문제들이 얽혀 있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낡은 교육 패러다임으로부터 이득을 보는 세력들의 기득권이 교육 혁신의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고, 여기에 자식들을 해외에 조기 유학 보낼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지도자 혹은 기득권자들이 부당한 현실에 눈을 감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아래로부터 교육 혁신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내 자식들을 입시 기계로 만드는 사교육 시장에 고액을 낭비하면서까지 보낼 수밖에 없는 보통의 학부모들이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고비용을 들이지만 끝내는 둔재(鈍才)를 양산할 뿐인 이 모순의 극치를 끝장내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고 인식하는 애국 시민들이 한목소리로 외칠 때입니다.

   “그 나라와 장기전에서 이기려면 그 나라 어린이들의 교육을 망가뜨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우리 아이들은 병들고 지쳐 있습니다. 순진무구해야만 할 어린 아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을 보면 기겁하지 않을 어른들이 없을 것입니다. 이 아이들을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대한민국의 커다란 사회 문제인 학교 폭력은 몇몇 학생들의 비행(非行) 문제가 아닙니다. 한창 신나게 뛰어놀고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를 펴야 할 아이들을 거대한 감옥에 강제로 수감하고 있는 이 사회가 이렇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병든 학교에서 우열을 가려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정말로 미래 국가의 동량(棟樑)이어야 할 우리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이대로는 안 됩니다. 

   저는 다른 무엇보다도 교육만큼은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근혜 정부도 이런저런 교육 공약을 했습니다만, 근본적인 혁신을 위해서는 몇몇 공약으로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민·관 합동으로 대통령 직속의 교육혁신위원회를 만들어 범국민적인 차원에서 교육 혁신을 이뤄내야 합니다. 5년 임기 안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놓는 것을 목표로 삼아 대통령이 직접 주도한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박근혜 정부는 ‘창조 경제’를 주창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하건대, ‘창조 경제’ 자체는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대한민국이 ‘창조 경제’를 넘어 ‘창조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창의적인 교육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창의 교육은 각 개인의 소질과 개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이야말로 교육의 참뜻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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