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친정을 선포한 고종은 수신사인 김홍집이 일본 파견에서 돌아올 때 가져온 ‘사의조선책략’을 접하고 부국강병을 위한 개화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신식 무기와 피복을 갖춘 신식 군대인 별기군도 이 정책 중 하나였다.

고종은 5군영을 폐지한 후 무위영과 장어영으로 군제를 개혁했다. 이때 신체 건강한 80명의 지원자를 뽑아 신식 군대인 별기군으로 칭하였으나 나머지 대부분의 5군영 군졸들은 실직을 하게 되었다.
 
개혁된 2군영에 남아 있던 군졸들 역시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무려 13개월 동안이나 봉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에 반하여 신설된 별기군은 급여도 훨씬 좋을뿐더러 신식 무기와 피복을 지급받아 구식 군졸들과 큰 차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만이 최고조로 달해 있는 와중에 1882년 6월 5일, 선혜청(대동미, 대동전 출납을 관장한 관청)의 도봉소는 구식 군졸들에게 한 달 분의 급료를 지급했다.
 
받아야 할 것이 많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며 군졸들은 급료를 달갑게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급료 포대에는 쌀만 있는 것이 아닌 겨와 모래가 섞여 있었고 그나마 쌀도 썩어 있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13개월 만에 급료를 받은 것도 서러운데 무게에 장난을 치고 그나마 남은 쌀 역시 먹기 어렵게 만든 행태에 이들은 격분하게 되었고 이를 영관에게 격렬하게 따졌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는 이를 괘씸하게 여겨 이들 중 주동자격인 2명에 혹독한 고문을 가하고 처형하도록 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군병들은 더 이상 참을 수 가 없어 6월 9일 창고지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집으로 몰려가 저택을 파괴하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곧 운현궁으로 찾아가 대원군에게 하소연하게 되었고 대원군은 이들을 겉으로는 달래 주고 한 편으로는 심복 허욱을 시켜 이들을 지휘하게 하였다.
 
 
지휘를 받기 시작한 군병들은 동별영(東別營)과 경기감영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포도청에 난입해 잡혀 있던 동료를 구출하고 개화파 관료들을 습격하게 되었다. 특히 저녁에는 일본공사관을 습격하여 일본 공사가 가까스로 탈출을 하였으며 6월 10일에는 심화되어 영돈녕부사 이최응이 살해되었고, 그 뒤로 궁궐 내로 난입한 군병들에 의해 사건의 발단이 된 민겸호와 김보현도 살해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이번 기회에 자신을 몰아낸 민씨 권력의 핵심인 명성황후를 제거하려 했지만 이미 명성황후는 궁녀 변장을 하고 도망을 간 상황이었다.
 
고종은 군민들이 궐까지 쳐들어오자 위급함을 느끼고 이 사태를 진정시켜달라며 다시 흥선대원군에게 전권을 넘겨주었다. 이리하여 대원군은 다시 권력을 되찾아 군제를 다시 개편하는 등으로 민심을 달래려 하였다.
 
하지만 군난을 진압해 달라는 요청을 이미 일본과 청나라에 해 놓은 상태였고 청나라 군대가 파견되어 대원군을 납치해 가는 바람에 대원군의 재집권 기간은 33일에 불과하였다.
 
이 난으로 인해 결국 청과 일본은 조선에 대한 권한만 더욱 강력해졌다. 특히 일본은 주모자 처벌과 손해 배상을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조약을 체결하는 성과까지 얻었다.
 
이미 소모될 대로 약해진 국력에 내부까지 다스리지 못해 일어난 난은 이제 조선에게는 조선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난들을 틈타 청과 일본은 야욕을 유감없이 드러냈고 조선은 어쩔 수 없이 들어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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