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 / 디자인 이정선 pro] 과거 홍콩 영화에 범죄의 온상으로 단골 출연했던 장소 구룡채성. 구룡성, 추룡성채로 불리기도 하는 이 장소는 단순히 겉모습이 음침하고 낡아 출연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무법 천지였다.

온갖 범죄란 범죄는 다 발생했던 구룡채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알아보도록 하자. 

구룡채성은 원래 해상 방어의 거점으로 송나라 시절 해적의 위협으로부터 지역 산물인 소금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기지로서 세워졌다. 

1842년 아편전쟁에 패한 청나라는 영국에 홍콩을 내 주어야 했는데, 이 곳 만큼은 영국을 감시하기 위한 청나라의 전략적 거점으로 남겨두어 청나라의 관할로 남아 있었다.

1898년 2차 아편전쟁에 패한 청나라는 신계 지역을 추가로 99년 동안 영국에 조차(租借 : 집이나 땅을 빌려 쓰다)하는 조약을 체결하게 되어 사실상 홍콩권역에 편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구룡채성만은 청나라군과 행정관이 계속 주둔하여 영국에게서 청나라의 소유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청일전쟁 당시 일본이 구룡채성의 외벽과 건물을 파괴했고, 청나라 행정관은 영국에 의해 추방되었다. 이로 인해 구룡채성은 영국도, 중국도 관리를 하지 않는 방치 지역이 되고 말았다.

구룡채성에는 700명 정도가 살고 있었는데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 내에서 내전이 발생하자 많은 중국 난민들이 홍콩으로 밀려들어오게 되었다. 갈 곳 없는 이 난민들은 방치되어 있던 구룡채성으로 밀려들게 되었고 이 한정된 지역에 몰린 사람들은 콘크리트 건물을 위로 증축시키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구룡채성에는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면적당 엄청난 인구 밀도를 자랑하게 되었고 3층 높이였던 건물들이 최종적으로는 15층의 높이가 되어 안쪽은 햇빛도 들지 않게 되었고 채성은 미로 같은 구조가 되었다. 

또한 어떤 설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 마구잡이식으로 증축이 되어 하수시설도 없을뿐더러 배선도 안 되어 있어 전깃줄은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었고 악취가 심각했다. 또한 중국은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고 영국은 방치한 상황이어서 사실상 둘 다 방치한 모양새가 지속되었고 이런 일종의 무정부 상태에서 구룡채성은 살인은 물론이고 마약, 인신매매 등 범죄란 범죄는 모두 일어나는 곳으로 악명을 떨쳤고 결국 삼합회라는 세계적인 폭력조직의 실질적인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영원히 무정부 상태로 남아 있을 것 같던 이곳은 홍콩의 반환시기가 임박해지면서 홍콩정부와 중국정부의 관리를 받기 시작한다. 

1984년 중영공동성명이 체결되면서 1999년 홍콩의 중국 반환이 결정되었고 홍콩 정부는 구룡채성 지역에 경찰 파견 및 행정권 등의 주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국과 영국 양측은 1987년 이 골치 아픈 지역을 철거할 것을 공식발표했다. 

이에 지역에 사는 주민들과의 보상을 둘러싼 마찰이 발생했지만 지역적인 가치가 전혀 없던 지역이기 때문에 홍콩정부는 27억 홍콩 달러를 들여 3만 3천여 주민들에게 보상을 마무리 하고 1994년 4월 철거를 완료했다. 

홍콩 정부는 이렇게 철거된 구룡채성 터에 구룡채성공원(九龍寨城公園)을 조성하였고 무정부 지역, 범죄의 소굴, 악취와 불결의 대명사로 불렸던 구룡채성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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