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문선아 선임 에디터, 김지영 인턴/디자인 이연선 pro]

▶ 마오쩌둥 (Mao Zedong)
▶ 출생-사망 / 1893년 12월 26일 – 1976년 9월 9일
▶ 국적 / 중국
▶ 활동분야 / 정치
▶ 주요저서 / 《지구전론》,《신단계론》,《신민주주의론》

중국 공산당과 중국인민해방군,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 지도자. 문화혁명을 일으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 정치인.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공부벌레
마오쩌둥은 1893년 후난성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오의 형제는 모두 7명이었지만 이 중 아들 셋만 살아남았고 마오쩌둥은 그 중 맏이였다. 6세부터 농사일을 도운 그는 8세 때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3세까지 《논어》와 《사서》 등을 읽으며 스스로 공부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16세 때까지 진학을 못하게 된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던 마오쩌둥은 농사일을 도우며 틈틈이 책을 읽다 동산 고등소학에 들어갔다. 그 뒤 창사의 상샹(湘鄕)중학으로 옮겼고, 《민립보》의 열렬한 독자가 되어 그 신문에 실린 반청론이나 혁명론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교사 양창지와의 만남
마오쩌둥은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에 입대하였다가 1912년 제대한 뒤 제1중학에 입학하였으며, 다시 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이 학교에서,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승 ‘양창지’를 만났다. 양창지는 영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중국의 봉건사상 비판에 힘썼던 교사였다. 1918년 학교를 졸업한 마오쩌둥은 양창지의 소개로 베이징 대학 도서관 주임인 ‘리다자오’의 조교로 일하면서 수업을 청강하였다. 또 양창지에게 유물론적 철학과 윤리학 강의를 받았고, 비밀 학생 단체들과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책을 읽어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로 기울게 되었다.

-혁명가의 길
1919년~1920년은 그에게 다사다난한 해였다. 1919년 5·4운동 발발 후 그는 후난학생연합회를 설립하고 《상강평론》이란 간행물도 펴냈으나 곧 폐쇄당하고 베이징으로 도망쳤다. 그해 10월 어머니가 사망하였고 이듬해에는 스승 양창지가 숨을 거뒀다. 양창지의 장례를 치른 다음날에는 그의 아버지가 사망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죽었음에도 그는 덤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고 1922년 양창지의 딸 양윤혜와 결혼하였다. 그해 그는 후난성 대표로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며 중국 공산당에서 입지를 굳혀갔다. 그는 서안 사건을 거쳐 국공합작에 성공하게 되자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고,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이상적 평등사회를 꿈꾼 대약진운동
1945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다툼이 시작됐다. 마오의 공산군은 4년여의 전투 끝에 국민당을 몰아내며 1949년 1월 베이징에 입성했다. 난징-상하이-창사를 거쳐 1949년 10월 1일, 마침내 마오는 베이징 톈안먼 관망대에 서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어 1950년~1953년의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나자 마오는 국가 재건 사업인 대약진운동에 착수했다. 1958년까지 이어진 이 운동을 통해 전국적인 토지개혁운동, 협동농장사업 등이 실시됐다. 마오가 생각했던 대약진운동은 대규모 협동농장식 농업을 통해 직업, 성, 연령, 교육 정도의 차이를 없애는 유토피아에 가까운 꿈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60년부터 2년여 동안 대기근이 중국을 휩쓸면서 대약진운동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문화대혁명과 고립된 죽음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실용 수정주의 노선이 당의 주도권을 쥐게 됐다. 그러자 정치적 위기를 느낀 마오의 교조주의적 노선은 1967년 1월 8일 친위 쿠데타라고 할 수 있는 정쟁을 일으켜 당시 당권을 쥐고 있던 류사오치와 펑더화이, 덩샤오핑을 축출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문화대혁명’이다.

1970년 그는 헌법수정초안을 채택하여 1인 체제를 확립하고 중국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마오쩌둥 체제 말기에 이르러 1976년 4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중반란인 천안문사건이 일어나 실각하게 되고, 그해 9월 그는 83세의 나이로 고립된 채 세상을 떠난다.

넓은 대륙에서 공산당 정권을 수립한 혁명가였던 마오쩌둥.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아쉬운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고, 중국의 사상적 통일에 기여했으며, 관료들을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립을 강조한 것은 그의 업적으로 기리 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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