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 / 디자인 이연선 pro]

▶ 찰리 채플린 (Charlie Chaplin)

▶ 출생-사망 / 1889년 4월 16일 ~ 1977년 12월 25일

▶ 국적 / 영국

▶ 활동분야 / 영국 코미디언, 영화감독, 음악가

▶ 작품 / 순례자, 황금광시대, 모던 타임스, 시티 라이트, 위대한 독재자, 라임라이트, 뉴욕의 왕, 서커스키드

무성영화 시절 ‘모던 타임스’, ‘위대한 독재자’ 등의 작품으로 시대를 풍자한 슬랩스틱 코미디 영화의 진수를 보여준 코미디언이자 영화감독.

 

- 예술인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다

1889년 4월 16일, 찰리 채플린은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뮤직홀에서 가수와 배우로서 공연하였고 어린 채플린은 그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하지만 생활은 궁핍했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이었으며 어머니는 병들어 있어 그리 행복한 어린 생활을 보내지는 못 했다. 그는 자주 아역 배우로 뮤직홀의 무대에 섰었는데 이는 그가 배우의 인생을 사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 미국으로

채플린은 1910년 미국 순회공연에 나섰다가 5개월 동안 순회를 마친 뒤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1912년 미국으로 가 키스턴 영화사에서 전속 영화배우로서의 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1914년 ‘생활비 벌기’라는 영화에 출연했지만 흥행에 실패했고, 자신 역시 이 영화를 싫어했다.

- 유명한 ‘떠돌이’ 캐릭터의 탄생

1914년에 제작된 두 번째 영화 ‘베니스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에서 그는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 내게 된다. 채플린은 둥근 챙모자에 꽉끼는 웃도리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짧은 지팡이를 들었다. 둥근 챙모자와 헐렁한 바지는 그의 장인이었던 희극 배우 "뚱보" 로스코 알버클의 것이었고 동료 희극배우 채스터 콘킨은 꽉끼는 웃옷을 구해주었다. 또한 구두는 동료 희극 배우인 포드 스텔링이 준 것이며 콧수염은 희극 배우 맥 스웨인의 머리카락을 잘라 붙였다. 이 캐릭터에서 채플린의 것은 지팡이 뿐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떠돌이 캐릭터는 그의 시그니쳐가 되어 전 세계인들이 그를 기억할 때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 엄청난 다작을 하며 성공을 거두다

당시 키스턴의 감독들은 매우 무성의하게 대본을 써서 채플린에게 주었고 채플린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작품성이 있는 영화를 원했고 때문에 자신이 스스로 감독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감독한 첫 영화인 사랑의 20분 (Twenty Minutes of Love / 1914)과 키스턴 최초의 장편 코미디 영화인 '틸리의 무너진 로맨스(Tillie's Punctured Romance / 1914)'가 엄청난 흥행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채플린의 위상은 매우 높아졌다. 그는 이후로 거의 1주에 영화를 한 편씩 찍는 엄청난 스케줄을 소화했다.

- 가난한 사람을 대변하다

소비성 영화를 추구했던 키스턴의 살인적인 스케줄에 지친 채플린은 다른 영화사를 돌면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한다. 특히 작품성의 증대를 추구했으며 코미디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주로 빈민층이라는 것을 고려하여 영화에서 당하는 사람들을 상류층, 차별주의를 가진 경찰, 콧대 높은 여성 등으로 설정하여 대리만족을 주었다. 이를 통해 그의 인기는 더욱 높아져 그에 관련한 상품들도 만들어져 판매되는 등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 모던 타임즈

1919년 그는 유나이티트 아티스츠라는 영화사를 창립하여 1921년 희극과 비극이 공존한 영화 ‘키드’를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뒀다. 또한 1922년에는 ‘순례자’를 발표하여 개신교의 무분별한 전도를 풍자하여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는다. 그리고 그는 1925년 황금광 시대, 1928년 서커스, 1936년 모던 타임즈 등 걸작들을 차례로 선보이면서 그의 두 번째 최고 전성기를 맞게 된다.

- 유성 영화의 시작, 채플린 영화의 끝

채플린은 1928년 유성영화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더 이상 상상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영화계 은퇴 선언을. 그리고 그는 1936년 모던 타임즈를 통해 기계화와 자본주의 시장을 풍자했고 1940년 발표한 발성영화 ‘위대한 독재자’를 발표하여 공산주의자이자 반미 사상 주의자로 낙인 찍혀 버렸다. 이로 인해 당시 미국의 후버 대통령이 채플린을 감시하기도 했다. 또한 조앤 배리라는 여성과의 성폭행 소송에 연루되었고 블랙 코미디 영화 살인광시대(1946)역시 관객들에게 비난을 당하면서 채플린의 인기는 사라지게 된다.

- 스위스에서 생을 마치다

미국 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는 스위스에 머물면서 영국에서 영화를 제작하였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평을 들으며 관객들에게 외면당했고 그렇게 그는 점점 잊혀져갔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 그는 영화계에 공헌한 업적에 대한 각종 상과 직위를 수여받았고 1972년에는 영화 예술 아카데미가 바치는 명예상 시상식을 위해 약 20년 만에 미국 땅을 다시 밟았다. 그가 수상을 할 때 시상식 참석자들의 전원 기립 박수를 받자 그는 감격에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7년 크리스마스에 그는 스위스 브베에 있는 자택에서 잠을 자던 중 사망했다.

그는 자택 근처의 묘지에 안장되었지만 장례 2달 후 그의 묘는 도굴되었고 그의 가족들에게 그의 유해를 찾고 싶으면 금전을 달라는 협박 전화가 왔다. 하지만 이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 그는 도굴 시도를 막기 위해 관 위에 콘크리트가 씌워지게 되었다.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음악가로서 엄청난 천재성을 보였지만 인생의 굴곡이 많았던 채플린. 죽음마저 영화 같았던 그는 뼛속까지 천생 연예인이었고 그의 마임과 슬랩스틱은 100년 가까지 지난 지금도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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