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심재민 기자 /디자인 이연선 pro]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출생-사망 / 1483. 4. 6 ~ 1520. 4. 6.

▶국적 / 이탈리아

▶활동분야 / 미술, 건축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천재 예술가.

 

- 비극적 유년기, 꺾이지 않는 미술가의 꿈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인 라파엘로는 궁정화가 ‘지오반니 산치오’의 아들로 태어났다. 궁정화가였던 아버지 지오반니 산치오로부터 그림의 기초를 배우다 9세때 어머니를, 12세 때에는 아버지까지 여의게 되었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그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17살이 되던 해 페루지아로 가서 피에트로 바눈치를 스승으로 삼았고 이듬해부터는 라파엘로 산치오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의뢰받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를 좇다
1504년 22살이 된 라파엘로는 세계 예술의 중심지로 불리던 ‘피렌체’로 떠났다. 그곳에서 라파엘로는 미술에 대해 더욱 깊이 공부하며 목표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 미술계를 선도하던 레오나르도와 미켄란젤로의 업적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 이때 라파엘로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와 함께 3대 천재 예술가로 발돋음 하는 발판을 다지게 되었고 현재까지 명성이 이어지고 있는 ‘성모자상’과 ‘초화상’ 등의 작품이 많이 탄생하게 되었다.

- 로마에서 예술의 혼을 불태우다
피렌체에서 몇 년간 활동을 하던 라파엘로는 1508년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해 로마로 건너갔다. 그렇게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기법을 연구하며 자신만의 색채를 더해 미술계에 이름을 떨치던 그는 1509년 로마교황 율리우스 2세를 위하여 바티칸궁전 내부에 있는 스탄체 서명실의 벽화를 그렸다. 이것을 시작으로 바티칸 궁전에 자신의 대표작인 ‘성체의 논의’, ‘아테네학당’, ‘파르나소스’, ‘삼덕상’ 등을 그리며 탁월한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작품 활동을 비롯해 로마의 고대유적과 고전 연구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완성단계에 있던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성당 천장화에서 조형적 파악법을 배워 고전적인 격조 높은 걸작을 이룩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무렵 ‘어느 추기경의 초상’ ‘토마소 잉기라미의 초상’ ‘폴리뇨의 성모’와 같은 걸작을 남기는 등 전성기를 맞는다.

-미술가로서의 역량, 건축에까지 미치다
라파엘로는 미술가로서의 성공에 이어 건축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1514년 성베드로대성당 건조에 관계하였고, 1514∼1517년 바티칸궁전의 ‘스탄차델 인첸디오’ 벽화장식에도 종사하였다. 그렇게 건축에도 형식주의를 바탕으로 역량을 발휘하며 세계적 문화유산인 ‘키지예배당’의 설계와 장식, ‘바티칸궁전’의 로지에의 장식, ‘빌라마다마’의 건축 등에 종사하였다.

-종교개혁 운동이후 쇠퇴하며 역사 속으로
라파엘로는 뛰어난 미술가/건축가로 인정받으며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화려한 궁정화가로서 일 승승장구 했다. 그러나 그의 예술은 종교개혁운동을 계기로 차차 내리막을 걷게 된다. 그래서일까 그의 쇠퇴는 작품에도 드러나는데, 특히 제자들과 함께 그린 파르네지나궁의 천장화 ‘프시케의 이야기’에서는 전성기 때의 감미로운 리듬은 사라지고 고대 조각의 영향을 조악하게 반영한 것 같다는 혹평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작심한 듯 ‘그리스도의 변용’이라는 작품 활동을 시작하지만 완성하지 못한 채 젊은 나이인 3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37년 짧은 생을 살며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라파엘로, 그는 19세기 전반까지 고전적 규범으로 받들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걸작을 남겼고 자신이 좇고 연구하던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 양식의 3대 미술가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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