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욕망을 작품으로 묘사한 ‘구스타프 클림트’ [인포그래픽_세계인물편]
뜨거운 욕망을 작품으로 묘사한 ‘구스타프 클림트’ [인포그래픽_세계인물편]
  • 보도본부 | 이연선 pro
  • 승인 2016.09.0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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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한지윤 에디터/디자인 이연선 pro]

▶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 출생-사망 / 1862.7.14 ~ 1918.2.6

▶ 국적 / 오스트리아

▶ 활동분야 / 화가

▶ 주요작품/ ‘키스’, ‘유디트’, ‘다나에’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의 빈 분리파를 창설한 화가이자 아르누보의 대가다. 그는 많은 여성들과 사랑을 나눈 ‘연애 지상주의자’였지만 사생활의 노출을 꺼렸기 때문에 그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아르누보 미술의 대가, ‘클림트’
아르누보란 19세기 말에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가 주도한 ‘미술공예운동’에서 일어난 미술의 분파다. 클림트의 아버지는 세공사였는데, 클림트는 아버지와 당시 최신 유행이었던 아르누보 화풍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클림트는 신체나 의상을 꽃이나 덩굴식물을 패턴처럼 묘사하곤 했는데 이렇게 자연물을 패턴화한 것은 아르누보 양식의 특징이다.

-빈 분리파를 창설하고 총체예술을 실현하다.
1897년 클림트는 당시 미술계를 휘어잡고 있던 권위주의적인 원로미술가집단 ‘빈 미술가협회’에 반발하여 ‘빈 분리파’를 창설한다. 건축가 오토 바그너,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등 19명의예술가들이 빈 분리파에 합류했다. 빈 분리파는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표어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이상인 총체예술을 실현하여 대중들의 시선을 끌었다.

*총체예술: 건축, 회화, 음악이 한 공간에서 조화를 이룬 예술

-동생을 잃은 슬픔, 미술로 승화하다
클림트는 금속이나 모자이크 기법을 이용한 장식을 바탕으로 상징주의 미술을 전개했다. 클림트는 1892년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으로 인해 깊은 슬픔을 겪은 후 상징주의자로 변모했다. 그가 빈 대학의 천장화로 사용하기 위해 그린 연작 ‘철학’, ‘의학’, ‘법학’ 스케치에서 그의 상징주의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빈 분리파와 작별하다

그는 ‘베토벤 프리즈’ 전시회에서 그린 작품, 앞서 언급한 연작 등에서 나체·성 같은 외설적인 소재로 인해 대중들의 싸늘한 눈총을 받는다. 그로 인해 클림트는 빈 분리파 내에서도 지지를 잃었다.

클림트는 결국 1904년 빈 분리파 전시회에 ‘물뱀’을 출품한 것을 마지막으로 빈 분리파를 떠났다. 하지만 빈 분리파와 작별하면서 클림트는 더욱 자유로운 미술 세계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클림트의 로맨스를 담은 ‘키스’
클림트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수많은 여성들과 로맨스를 즐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여인 14명이 친자확인소송을 낼 정도였다. 이렇게 바람둥이였던 클림트의 유일한 ‘연인’으로 추측되는 여성이 한명 있는데 그녀의 이름은 밀리 플뢰게이다.

그녀는 클림트가 눈을 감을 때까지 그의 옆을 지켰고 클림트와 나눴던 편지를 모두 태워 그의 비밀을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전문가들은 클림트와 유독 가까웠던 플뢰게가 연인이 키스하는 순간을 금빛으로 담은 작품 ‘키스’의 주인공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클림트는 생전에 이름을 알린 화가였지만, 다른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고독한 길을 걸었다. 클림트가 대중들이 원하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다면 그는 더 영화로운 삶을 누렸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클림트는 당시 금기되었던 사람의 근원적인 욕망을 표현했고 미술을 향한 그의 고집은 20세기말부터 재조명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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