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피플] 8월 개봉 ‘덕혜옹주’,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의 고달픈 삶의 애환
[시선★피플] 8월 개봉 ‘덕혜옹주’,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의 고달픈 삶의 애환
  • 보도본부 | 심재민 기자
  • 승인 2016.06.14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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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심재민] 2016년 8월 또 다른 한국영화 기대작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인 고종의 딸, 덕혜옹주의 삶을 재조명하는 영화로 제목은 '덕혜옹주'이다. 영화의 개봉 소식이 전해지며 자연스럽게 덕혜옹주의 삶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

▲ [사진/ 영화 '덕혜옹주' 포스터]

1962년 1월 26일. 세월의 풍파에 찌든 얼굴에 초점 없는 눈매를 한 채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가 37년 만에 고국의 땅을 밟았다. 일본에 의해 14세의 꽃다운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 보내져 51세의 중년의 나이에 삶의 무게를 이고 돌아온 덕혜옹주는 결국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1989년 4월,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덕혜옹주는 일제 치하 시절이던 1912년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과 궁녀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머니 ‘양귀인’이 측실(첩)이었기 때문에 ‘옹주’라고 호칭되었다. 한편, 양씨는 덕혜옹주를 낳고 복녕당이라는 당호를 하사받았다.

▲ 덕혜옹주와 가족들. 맨 오른쪽이 '덕혜옹주', 맨 왼쪽이 오빠 '영친왕' [사진/위키피디아]

고종황제는 9남 4녀의 자녀가 있었지만 3남 1녀만이 성년이 될 때까지 생존하여 덕혜옹주가 사실상 유일한 딸이었다. 늦둥이었던 덕혜옹주는 고종의 애정과 관심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대표적인 예로 고종은 그녀를 위해 따로 유치원을 개설했고 덕혜옹주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받았다. 막내딸 덕혜옹주는 1907년 일제의 압력으로 강제 퇴위를 당한 후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고종에게 삶의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권을 잃은 나라의 옹주에게 순탄치 않은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1919년 덕혜옹주가 8살이 되던 해 고종이 승하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어린 나이의 옹주에게 부친을 잃은 슬픔보다 더 큰 비극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먼저, 덕혜옹주의 거처가 고종과 함께 지내던 덕수궁 함녕전에서 어머니 복녕당 양씨가 거처하는 광화당, 이어 고종의 전각과 함께 창덕궁으로 점차 뒤편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 일본으로 떠나기 전 덕혜옹주 [사진/ 위키피디아]

뿐만 아니라 일본은 덕혜옹주가 10살이 되던 해부터는 조선 황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시켰다. 이로 인해 그녀는 일본이 세운 일출소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복녕당 아기씨’로 불리다 ‘덕혜’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받게 되었다. 이후, 일제의 압박에 의해 14살이 된 덕혜옹주는 어린 나이에 일본 동경유학길에 떠밀려 오르게 된다. 당시 어린 소녀는 정든 고국의 궁궐을 멀리 떠나 일본이라는 낯선 이국땅에 발을 디뎠다.

1925년 덕혜옹주는 일본에 도착해 오빠인 영친왕의 거처에 함께 지내며 본격적인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년 뒤 덕혜옹주는 오빠인 영친왕의 죽음에 이어 1929년 생모인 양씨의 죽음까지 어린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운명을 맞게 되었다. 낯선 이국 땅에서 말 그대로 고아가 된 것이다.

▲ 소 다케유키과 덕혜옹주 [사진/ 위키피디아]

혼자가 된 그녀에게 일본의 압력은 거세지기 시작했다. 1931년 덕혜옹주는 일제에 의해 일본의 대마도 백작 소 다케유키와 정략적인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조선의 백성들은 크게 분노했고, 조선일보는 신랑의 얼굴을 삭제한 결혼식 사진을 실어 분노한 민심을 대변하기도 했다.

그렇게 1년 후 덕혜옹주는 딸 정혜를 낳았다. 하지만 덕혜옹주에게 행복은 주어지지 않았다. 1956년 딸 정혜까지 실종되게 된다. 덕혜옹주는 길지 않은 삶 동안 나라를 잃고, 일찍이 부모와 오빠를 여의고 거기에 자식까지 잃은 것이다. 덕혜옹주는 결국 정신병인 조현병에 시달렸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의 패망 후 남편과는 이별을 하게 된다.

▲ 덕혜옹주 [사진/위키피디아]

그렇게 비극의 삶을 살다 1945년 해방 이후, 덕혜옹주는 흐릿한 정신 속에서도 고국으로의 귀국을 원했지만 이마저도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다 박정희 정부시절에 다시 탄원서를 올린 끝에 1962년 고국으로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귀국하던 그녀의 얼굴엔 귀한 대한제국 옹주의 빛깔은 없었다. 갖은 풍파에 시달린 표정과 초점을 잃은 눈빛이 대신하고 있었다.

덕혜옹주는 귀국 후 요양을 하다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창덕궁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 일간지에서는 “모든 것이 구슬프고 무서워 세상살이를 체념하고 살려다가 정신병자가 되었다”며 그녀의 슬픈 인생을 기록하기도 했다.

▲ [사진/ 영화 '덕혜옹주' 스틸컷]

덕혜옹주가 귀국 후 정신이 맑아졌을 때 쓴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라는 글귀가 마음 아픈 이유는 패망국의 비참함이 그녀의 삶에 온전히 비춰졌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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