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정묘호란(1627)으로 후금에게 호되게 당한 조선. 후금은 명나라 때문에 조선에 대한 침략을 중간에 멈추고 형제 관계를 맺고 돌아갔다. 하지만 조선은 여전히 후금의 저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명에 의리를 내세우며 후금을 오랑캐라 부르며 업신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거기에 후금 역시 오랑캐 기질이 돋아 형제의 관계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량이나 병선을 요구하거나 민가에 침략하여 약탈을 하는 등의 행동으로 조선의 격분을 일으킨다. 이에 척화배금(후금에 대한 화의를 반대한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나게 된다.

이 와중에 후금은 조선과 맺었던 형제 관계를 명과 같이 군신의 관계로 바꾸자고 요청해 왔다. 또한 황금, 백금 1만냥과 말 3,000필, 정병 3만까지 요구하는 등 조선으로서는 들어주기 힘든 요구까지 했다.

이에 조정은 야만인들과의 군신 관계는 얼토당토않은 일이라며 척화의 뜻을 보였고 인조는 후금의 사신 접견도 거절하고 국서를 받지 않았으며 감시시켰다. 후금의 사신은 일이 잘 못 돌아간다는 것을 느끼고 민가의 말을 훔쳐 도주하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이 후금에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제대로 파악하게 된다.

이에 후금은 다시 조선을 침략할 결심이 생기게 되었고 1636년 4월,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쳤다. 청의 태종은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의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라고 요구했고 조선은 이를 묵살했다.

그해 11월 청은 조선의 사신에게 다시 한 번 왕자와 대신, 그리고 척화론을 주장하는 자를 압송하라고 요구했지만 조선은 다시 묵살했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을 다시 침공(병자호란)하게 된다.

청나라는 12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는데, 조선은 청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모르고 방비를 하지 못하고 있다가 낭패를 보았다.

인조는 먼저 왕세자와 왕실 가족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후에 강화도로 가려 했다. 하지만 청군은 생각보다 더 빠르게 한양까지 밀고 들어왔고 인조는 어쩔 수 없이 한양을 지키는 요새 중 하나인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청의 군대는 남한산성을 포위했고 남한산성 역시 이 전쟁에 대해서 준비해 놓은 것이 없었으므로 군량은 고작 50일 치 밖에 없었다.

조선은 남한산성에서 45일 정도를 시위하게 되었다.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들이 관군을 끌고 왔지만 남한산성에 채 다다르기도 전에 청의 군대에 무너져 버리고 만다.

또한 조선은 명나라에도 구원을 요청했지만 명나라도 국운이 다 해 민란으로 군사를 보내줄 형편이 되지 못하였으므로 조선은 남한산성에 꼼짝없이 고립이 되어 버리게 된다.

거기에 안전할 것으로 믿었던 강화도마저 함락되어 왕실 가족이 모두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에 인조는 할 수 없이 항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은 결국 청과의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되는데, 내용은 명과의 관계를 끊고 청에는 군신의 관계를 맺으며 왕자와 대신의 자녀를 볼모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거기에 인조는 삼전도(오늘의 송파)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의 예로써 ‘3배 9고두(상복을 입고 3번 큰절을 하면서 땅바닥에 머리 9번 박는 행위)’를 해야만 했다.

조선 역사상 전에 없었던 이런 충격적인 사건은 인조의 아들인 효종이 청나라에 뼛속 깊은 복수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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