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극적인 삶을 산 왕 중 한 명을 꼽으라면 늘 세 손가락 안에 속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광해군이다. 광해군은 조나 종의 묘호를 받지 못하고 ‘군’으로 불린 왕이기도 하다. 광해군은 어떤 왕이었을까?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후궁인 공빈 김씨가 낳은 아들이다. 선조에게는 임진왜란 발발 당시까지 적자가 없어 세자 책정에 분란이 생기기도 했는데 큰 전쟁이었던 임진왜란(1592)이 발발하자 선조는 급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분조(조정을 나누어 맡음)의 책임을 지게 했다.

선조는 왜란이 터지고 의주로 피난을 갔지만 광해군은 평안도나 강원도 등을 돌며 민심을 수습하고 경상도나 전라도에서는 군량을 모으고 군기를 조달하는 등 분조의 책임을 다 하며 큰 공로를 세웠다. 그의 활동은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큰 요인 중 하나였다.

그렇게 큰 공로를 세웠지만 그가 순조롭게 왕이 되는데에는 큰 걸림돌이 생기게 된다. 바로 선조의 정실인 인목대비가 적자인 영창대군을 출산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선조는 자신에 비해 월등하게 유능한 광해군을 못마땅하게 여겨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한다.

왕위를 물려받은 광해군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했던 세력들을 처단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왕권에 큰 부담을 주는 존재인 영창대군을 역모의 죄로 교동에 유배시켜 제거해 버리고 그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는 폐위하고 서궁에 유폐시켜 버린다.

광해군은 이렇게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없애면서 강력한 왕권을 강화하였고, 국가를 정상적인 상태로 돌려놓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소됐던 궁궐을 복구하고 대동법을 시행해 민생 안정과 국고를 탄탄하게 하려 했다. 또한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 편찬을 마무리 하게 하는 등 내실을 쌓아 나갔다.

그리고 그는 외교에 있어서도 실리를 택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명을 따를 것인지, 새롭게 떠오르지만 오랑캐인 후금을 따를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명의 의리 보다는 실리를 택하는 선택을 했다.

광해군은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조선의 내실을 다지기 위한 노력과 성과를 많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결국 묘호를 받지 못한 왕으로 남게 되었는데, 1623년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를 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폐위가 된 이유는 그가 적자인 영창대군을 살해했다는 점과 어머니의 위치에 있던 인목대비를 폐위한 점, 그리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져버렸다는 ‘명분’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서인과 북인에 이한 붕당에 의한 이해관계에서 발생한 점일 뿐 자신들의 역모에 대한 명분 때문에 광해군을 폭군으로 표현하여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결국 인조반정으로 인해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폐되었다가 제주도로 이배되어 생을 마감하였고 대세를 못 읽고 광해와 반대 노선을 타 친명배금 정책을 펼친 조선은 후에 후금에 의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의 불꽃에 휘말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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