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인턴]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임진왜란의 발발 배경에는 일본의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명분도 있었지만 우리의 국력이 쇠했던 부분도 있었다. 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조선은 내부적으로 사림과 훈구세력의 갈등으로 인한 사화 등의 사건으로 정계가 혼란스러웠다. 또한 사림이 중앙을 장악했음에도 사림들끼리 또 분화가 되어 붕당을 이루는 등 당쟁을 이루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정치가 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비변사라는 군사 합의 기관 역시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의 내부가 이러하다 보니 외침에 대해 취약점을 간파한 율곡 이이(李珥)는 남왜북호(남으로는 왜나라, 북으로는 오랑캐)의 침입을 대비해 십만의 군을 양병해야 한다는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했다. 하지만 어지러운 정세만큼 국가 재정 역시 허약했기 때문에 이는 이룰 수 없는 주장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 이렇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일본은 대 변혁을 이루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혼란스러웠던 전국시대를 통일했다. 하지만 무력으로 통일 한 만큼 많은 반항도 있었고 언제든 다시 자신에게 칼이 겨눠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 무력들을 국외로 방출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자신의 위협도 없애면서 다른 제후들에게 목적의 통일성을 갖게 하는 묘책이었다.

이들은 사진들의 무력을 믿고 명나라를 침략할 생각을 했다. 그는 사신을 보내 명나라를 치자는 동맹을 요구했다. 하지만 선조는 이들의 수교문에 오만하고 무례한 구절이 있자 일본의 요청을 거부했다.

하지만 일본의 끈질긴 요청 끝에 조선은 도요토미의 저의도 알아 볼 겸 일본에 통신사(김성일, 황윤길)를 보내게 된다. 통신사가 돌아 온 후 조선에서는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서인인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으며 도요토미는 안광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여 반드시 병화가 발생할 거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동인인 김성일은 침입할 정형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도요토미는 사람됨이 서목(鼠目:작고 튀어나온 눈, 쥐 눈)이라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보고했다.

이에 서장관 허성은 동인이었으나 정사와 의견을 같이했고, 김성일을 수행했던 황진도 김성일의 기만에 분노를 참지 못했다.

통신사들이 이렇게 상반된 보고를 하니, 조정에서는 동서로 나뉘어 또다시 논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들의 주장 중 김성일의 주장이 국력이 덜 들어가므로 조정은 병화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하게 기대하면서 김성일의 주장을 좇아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지시켰다.

이런 와중에 일본의 사신은 거듭해서 조선을 통해 명으로 가겠다고 주장했고 이를 조선의 조정은 거부했다.

결국 대마도의 주군은 부산포에 와서 최후의 통첩을 하는데, 조선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부산의 왜관에 머무르던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소환되어 텅 비게 되자 일본의 침입이 있을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이에 조선은 부랴부랴 군 시설을 점검하게 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이와 반대로 일본은 오랜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노하우로 전쟁에 대한 준비를 다 하고 있었고 특히 조총 등의 신무기를 대량생산하여 침략 시기만 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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