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홍시라] 지난 3월 26일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순국 106주기 추모식을 맞아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추모식이 열렸다. 추모식에는 안중근 의사의 유족과 숭모회원 그리고 최완근 국가보훈처 차장까지 모두 400여 명이 참석했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중국 다롄(大連) 뤼순 감옥에서도 추모제가 개최되었다.

▲ 뤼순감옥 옥중의 안중근 의사 [출처=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하고 사형되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으로 순국 106주기가 되는 현재까지 존경 받고 있다. 1879년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난 안 의사는 우리나라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된 이후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워 민족계몽운동에 힘썼다. 또한 일제의 강점이 본격화되자 반일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1909년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을 맹세했는데, 실제로 2월 7일 옥중에서 쓴 글에 ‘태극기를 펼쳐놓고 왼손 무명지를 자른 뒤 생동하는 선혈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 글자 넉자를 크게 쓰고 대한민국 만세를 세 번 불렀다.’며 당시 상황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 안중근 의사의 잘린 손가락과 서약서 [출처= 국가보훈처 블로그]

그리고 그 해 10월 26일 만주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권총으로 사살했다. 그 전 달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고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가 이제 만주 침략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생각해 이를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체 없이 그를 사살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했다. 대동공보사의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10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하얼빈으로 향했다.

안중근 의사는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에서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뚫고 역 구내 찻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렸다. 이토 히로부미가 도착하고 9시 30분경 안중근 의사는 앞으로 뛰어나가며 권총으로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켰다. 이어서 혹시라도 이토 히로부미를 오해했을 까봐 주변에 가장 의젓해 보이는 일본인들을 향해 3발의 총탄을 더 발사했다. 이로 인해 이토 히로부미의 비서관과 하얼빈 총영사, 만주철도 이사 등 일본인 관리들이 총탄을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 곧장 안 의사는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그 순간에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그 후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에 투옥 되어 일제의 심문과 재판을 받았는데 그 와중에도 의연한 태도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1910년 3월 26일 순국했지만 이는 독립 운동의 불을 더욱 강렬하게 했다.

▲ 서거 전 안중근 의사 [출처= 위키피디아]

안중근 의사는 순국 전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남겼는데, 이 글에서 그가 두려워한 것이 죽음이 아닌, 조국의 운명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는다. 우리들 2,000만 형제 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에 신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는 자로서 유한이 없을 것이다.'

▲ 안중근 의사가 사망 직전인 1910년 3월에 쓴 유묵[출처= 위키피디아]

오로지 조국과 세계의 평화에 대한 갈망이 가득했고,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독립을 위해 힘쓴 안중근 의사. 그가 그토록 원하던 우리의 영토를 찾은 현재, 우리는 안중근 의사를 위시한 순국선열사에게 더 감사하며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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