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인턴]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1592년 왜군은 명을 치는데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명분을 앞세워 조선을 침략한다. 이 때 왜군은 9개 부대, 2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세 방향으로 침략을 개시했다.

 

왜란 발발 초반 조선은 부산성 전투(4월 14일), 동래성 전투(4월 15일), 충주 전투 등에서 연패를 하였고 결구 서울이 함락되었으며(5월 2일), 함경도 순으로 침입되어 호남을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을 장악 당한다.

선조는 4월 29일 왜군을 피해 의주로 몽진(피신)을 하게 됐는데 이에 노비들은 노비문서가 보관되어 있는 장례원을 불태웠고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세 궁궐도 난민들에 의해 모두 소진됐다.

조선의 정규군들은 왜군에 큰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쓰러져 갔고 이에 일반 백성으로 이루어진 의병들이 조선을 구하기 위해 일어섰다. 이들은 양반계층에서 천민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었으며 의병장은 대게가 문반 출신이었고 평민출신 의병장은 없었다.

의병들은 곽재우, 조헌, 정인홍, 고경명, 고종후, 김덕령, 정문부 등의 의병장들이 활약을 하여 혈전과 승리를 가져왔으며 이 중 곽재우는 최초의 의병으로 천강홍의장군으로 불렸다.

1592년 7월 15일, 조승훈이 이끄는 국경 수비군이었던 명군은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왜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게 된다. 1592년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왜군은 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2만의 군사를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하게 된다. 그러나 진주목사 김시민은 불과 3천 800여 명의 인원으로 성을 지켜냈고 성 밖에서는 전라도와 경상도 의병들이 일본군을 배후에서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 전투가 바로 진주대첩이다.

또한 1953년 1월 28일에는 명나라 이여송과 좌의정 유성룡의 지휘 하에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군은 고니시가 지키던 평양성 공격하여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그 해 2월 12~18일에는 전라도 관찰사 권율이 명군과 함께 도성을 빼앗기 위해 북진하던 중 행주산성에 도착하여 배수진을 치고 서울 탈환을 준비했다.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의 왜군은 많은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일시에 공격했지만 권율이 이끈 관군은 의승장 처영과 함께 격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게 된다.

1597년 조선과 왜는 화의의 결렬로 도요토미는 재침 명령을 내리고 가토, 고니시, 소오 등의장수가 다시 침공을 했다.

하지만 통제사 이순신은 명량 대첩(1597. 9월 15일), 노량 해전(1598. 11)에서 일본을 격파하여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이 끝나게 된다.

임진왜란의 간략적인 과정을 알아보았다. 다음 시간에는 임진왜란이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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