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연선]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George Fredric Handel)

▶ 출생-사망 / 1685.2.23 ~ 1759.4.14

▶ 국적 / 영국

▶ 활동분야 / 예술

▶ 주요작품 / <메시아 Messiah>, <알렉산더의 향연 Alexander's Feast>,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 Royal Fireworks Music>

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헨델은 바흐와 함께 바로크 음악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헨델은 어려서부터 음악적 소질이 뛰어났고 유럽을 돌아다니며 활동을 했기 때문에 다양한 나라의 성격을 함께 느낄 수 있다.

 

- 함부르크, 하노버에서의 헨델
독일 할레에서 태어난 헨델은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그러나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쉽게 음악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할레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고, 18세에 함부르크의 오페라 극장에 바이올리니스트로 일자리를 얻게 되면서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헨델은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에서 최초의 오페라였던 알미라(Almira) 상연에 성공한다. 헨델은 이 일로 인해 음악가로서의 자신감을 얻었고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게 되고, 여행 중 만난 하노버 선제후의 궁정 악장 스테파니의 추천으로 25세가 되던 해 궁정 악장으로 취임한다.

- 영국에서의 헨델
헨델은 하노버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떠나게 된다. 고향에 들렀다가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향하게 되는데 당시 영국에서는 이탈리아오페라가 자주 상연되던 시기였다.

그래서 헨델은 이탈리아오페라에 관심을 보이고 첫 작품 <리처드 1세 Richardo Primo>를 상연해 대성공을 거둔다. 이것을 계기로 헨델은 귀족사회에 드나들면서 즉흥 연주가로서의 지위도 확보해 나가며 크게 활약했다.

- 왕립 음악 아카데미에서의 헨델
헨델은 왕실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여왕의 총애를 얻어 왕실 악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1714년 여왕이 갑자기 사망하고 하노버 선제후가 왕위에 오르지만, 귀임이 늦어졌기 때문에 헨델과 왕 사이는 서먹서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먹함은 해소됐고 왕실 악장의 지위가 확보되어 또다시 활약을 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귀족들이 인기가 떨어진 오페라를 부흥시키고자 왕에게 건의해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한다. 그리고 헨델은 이곳에서 예술부문을 담당하면서 음악가 활동의 거점으로 삼게 된다.

- 헨델의 가장 큰 성공, 메시아
헨델의 창작력 전성기가 지나고 이탈리아 오페라는 중산계급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던 영국 시민계급이 궁정적, 귀족적 취미를 배경으로 한 이탈리아오페라에 대한 반발을 보인다. 이후 왕실 음악 아카데미는 부득이 문을 닫게 된다.

헨델은 이듬해에 아카데미를 재건했지만 귀족오페라에 밀려 극장을 폐쇄하기에 이른다. 이후 코벤트 가든 오페라극장 경영에도 나섰지만 건강악화와 경제파탄으로 음악가로서의 활동을 끝내게 된다.

하지만 헨델은 병을 이겨내고 오페라를 떠나 오라토리오로 관심을 쏟고, 그리고 그의 대작인 메시아를 24일 만에 완성하게 된다. 하지만 메시아는 당시 청중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1750년 말에 이르러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된다.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에서 큰 활약을 했고 영국으로 귀화까지 했던 헨델. 바흐의 곡보다 근대적인 경향이 강했던 것은 영국의 근대 사회 활동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헨델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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