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인턴]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명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여 정권과 국가의 안전을 보장 받는 것을 꾀했다. 이미 조선이라는 국가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성립된 나라기 때문에 명과의 친분은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은 명나라와는 사대(事大)의 관계를 유지했다. 이 당시에는 워낙 중국이 강대하였기 때문에 동아시아는 보편적으로 이런 국제 관계를 표시하는 것을 인정했다. 사대란 선진 강대국인 명나라의 주변 제국들이 명분상 중국의 연호를 쓰고, 중국과 조공 및 책봉 관계를 맺는 관계를 뜻한다.

하지만 사대를 한다고 해서 지배 예속의 관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성을 서로 인정하였고 단순히 명나라(중국)을 통한 국제 사회로의 편입을 의미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조선은 명나라를 제외하고는 일본과 여진족에 대해서 평화적인 회유 정책과 강경책을 번갈아 써서 평화 관계를 유지하는 교린(交隣)정책도 함께 추진했다.

조선의 건국 초기에는 정도전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요동 정벌계획 때문에 명과의 갈등 관계가 유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도전이 축출된 태종 대에는 양국의 관계가 친선관계를 유지하면서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명과는 파견된 사신과 동행하여 교역을 하는 사행 무역(공무역)이 주를 이루곤 했다.

명과의 사대의 관계는 명에게 구체적인 내정간섭을 받지는 않았지만 16세기에 사림이 집권하면서 존화주의를 바탕으로 스스로 내정간섭을 바라는 식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조선은 여진과는 회유와 토벌의 양면 정책을 취했는데 회유책으로는 토지와 주택을 제공하면서 귀순을 장려했다. 또한 국경 지방인 경성, 경원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해 주었다.

하지만 틈만 나면 약탈을 일삼는 여진족들에 대한 강경한 대응도 보였는데 4군 6진을 개척하여 국경선을 구축하였고 신숙주와 윤필상 등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을 토벌했다.

또한 주민들의 자치적 지역 방어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북방 사민(북쪽으로 백성을 이주)정책을 사용하기도 했다.

조선은 또한 왜(일본)에 대해서도 여진과 같이 강경책과 회유책을 번갈아 가면서 대응했는데 잦은 왜구의 약탈 때문에 세종은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시키는 등의 강경책을 사용하기도 했고 삼포(부산, 울산, 진해)를 개항하여 무역을 하는 회유책을 쓰기도 했다.

이처럼 초 강대국이었던 중국에는 사대를, 조금 힘이 약했던 여진과 일본에는 적절하게 강약을 섞어서 진행했던 대외정책들. 조선 초기에는 맺고 끊음이 확실했던 적절한 외교를 했던 것으로 평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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