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인턴]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자고로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국방력의 강화와 중앙의 정책을 효과적으로 지방으로 전달하는 등 중앙 집권적 행정 운영에 크게 기여한다. 이 때문에 중앙 집권을 중시 여기는 조선 역시 교통과 통신을 발전시키기 위해 고심을 하게 된다.

조선은 육로로는 역원제를 운영했다. 역은 관청의 공문을 전달하고 공납물을 수송하며 국방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주요 도로에 설치하는 기관으로 병조에서 관할하였다. 전국 287개의 역참이 설치되어 물자의 수송과 통신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원은 교통 요지에 설치하여 사자가 공무 수행 중 이용하는 공공 여관이었다.

 

우리나라는 지역 특징 상 산이 많아 육로를 이용하는 것보다 수로를 이용하는 편이 훨씬 빠르고 안전했다. 때문에 주로 해운을 이용하여 지방의 세미를 많이 수취했는데, 고려시대 무신정변과 왜구들의 잦은 습격으로 인해 해운을 이용하는 일이 거의 사라져 갔다.

하지만 조선시대는 왜구를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이성계가 나라를 만들기도 했고 도읍 역시 해운으로 세를 거두기 쉬운 곳을 정한 만큼 새롭게 해운에 대한 정비를 시작했다. 특히 전라도에서 생산되는 세곡들이 국가 재정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해운은 더욱 중요한 조운(조세운반) 체제라고 할 수 있었다.

지방에서 징수한 세미(세금 쌀 등)는 각 조창(지방창고)에 모였다가 한양의 중앙 창고인 경창으로 집결됐는데 이 때 관선인 일반 조운선과, 병조선(兵漕船)을 위주로 한 후기의 지토선, 훈국선 등의 선박들이 이용됐다. 이 중 병조선은 세조 때 군용과 조운에 모두 사용될 수 있도록 만든 배로 신숙주가 고안한 조선 조운의 대표적인 선박이었다.

조선의 통신은 군사적 침공이나 국가비상사태 등을 전달하기 위해 봉수를 이용했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신속하게 알렸는데 이런 봉수대가 전국에 약 620여개가 설치됐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말 가격의 상승과 역민(역참과 관련된 고역을 의무적으로 져야 했던 양민)의 도망이 잦아지자 역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였고 봉수대 역시 정말 급한 시기에 통신 수단으로서의 기능이 낮았기 때문에 명나라의 파발을 참고하여 파발제를 구축했다.

파발제는 전송 방법에 따라 말을 사용하는 기발과 사람이 직접 걸어서 가는 보발로 나누어졌었고 지역에 따라 서울과 의주 사이의 서발, 서울과 경흥 사이의 북발, 서울과 동래의 남발로 편성되어 확실한 통신을 꾀하였다.

국방력과 중앙집권을 중점으로 발전해 온 조선시대의 교통과 통신. 초단위로 해결이 되지 않으면 답답함을 느끼는 지금, 저 당시에는 얼마나 답답함을 느꼈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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