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경남 고흥)]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과 비슷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인 ‘소록도’에는 한센병 환자의 진료·보호·수용·관리와 한센병의 연구하기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아름답고 평온하기만 이 섬은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 아픈 역사의 시작은 일본에 의한 식민지 초기에서 시작된다.

▲ ⓒ지식교양 전문채널-시선뉴스

식민지 초기, 조선에는 광주, 부산, 대구 등 세 곳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사립 한센병 요양원이 있었으나 규모가 작아 수용인원이 적어 대부분의 환자들은 다리 밑이나 움막에서 살거나 유랑, 걸식하는 실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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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독부는 이러한 환자들이 국가 위상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일정한 장소에 격리 수용할 방침을 세워 지리적 요건으로 자연적으로 격리되며, 기후가 온화하며, 생활에 필요한 물이 많고 육지와 가까워 물자를 나르기 쉽다는 점을 들어 ‘소록도’를 적지로 선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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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은 강렬하게 저항했지만 섬 약 1/5에 해당하는 30여만 평, 집과 땅을 강제로 매수하여 이주시킨 후 1916년 2월 24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로 관제를 공포, 현재 국립소록도병원의 전신인 소록도자혜의원을 설립해 한센병 환자를 이주시켰다.

이후 강제수용된 원생들은 벽돌 제조, 자재 하역, 도로 개설 등 험한 공사에 동원되었고,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원생들의 생활은 굼주림과 강제 노동으로 피폐해졌으나 요양소 확장에 동원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수만장의 벽돌을 구워내야하는 등 중노동을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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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노동력도 없는 원생들까지 동원하여 연간 6천kg의 송진을 채취, 1941년도에는 500대의 가마니틀을 구입하여 연간 30만장의 가마니를 생산하였으며, 연간 1,500장의 토끼 가죽과 3만포의 숯을 제조하는 등 전쟁 군수물자 생산에 동원되었다.

이렇듯 소록도에는 한센병자료관, 구 소록도갱생원 검시실, 구 소록도갱생원 감금실 등 그 때 그당시 건물들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당시 뼈아픈 역사의 현장을 보고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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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로만 찾아 갈 수 있었던 소록도는 2009년 3월 2일 소록대교가 완전 개통되면서 조금 더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치료 중인 한센병 환자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는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없으며, 일몰 후 출입은 통제되기 때문에 소록도를 가게 되면 참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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