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다희] 프랑스가 핵추진 항공모함 샤를 드골함을 앞세워 IS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에 샤를 드 골 항공모함 위력에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샤를 드골 항공모함은 우리나라의 이순신함과 같이 사람 이름에서 따온 항공모함이다.

샤를 드 골은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운동가이며 군사 지도자이자 정치인이다. 1945년부터 58년까지 총리를, 1958년부터 대통령을 지냈다.

릴에서 출생한 샤를 드 골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에서 자랐다. 1912년 생시르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 중위로 참가하여 최고 훈장을 받았는데 프랑스 육군 수훈보고서에는 3차례 드골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1918년 제1차 전쟁이 끝난 후 최고 국방 회의 사무국장이 되었다.

▲ (출처/위키백과)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드골은 1940년 5월 제4기갑사단 지휘관으로 부임하였다. 2차례의 전차전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이론을 적용했던 그는 정력적이며 대담하고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40년 6월 레노 총리 아래서 국방부 육군담당 차관이 되었으나, 독일과의 휴전을 모색하고 있던 페탱 원수가 레노를 축출하고,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런던으로 망명하여 자유 프랑스 민족회의를 결성하였다.

영국으로 망명한 드골은 런던에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를 독려하며 자신을 중심으로 독일 항전을 계속하자고 호소했고 프랑스의 친 독일 정부였던 비시 정부는 드골을 궐석재판(피고인이 재판정에 참석하지 않은 재판)에 세워 계급을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한 뒤 사형을 선고하였다.

영국과 프랑스 내에서 드골의 평판은 부정적이었으나 파리 해방 이후 연합국들은 드골의 위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드골은 1944년 프랑스 해방과 함께 임시정부 주석으로 취임된다.

샤를 드골 정권은 나치 독일에게 프랑스가 점령당한 기간 동안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언론인들을 처벌함으로써 잘못된 과거사를 심판하는 등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비록 69년 국민 투표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정계의 원로로서 막후에서 그가 사망하는 1970년 까지 실권을 행사했다.

미군을 제외한 최초의 핵 추진 항공모함인 샤를 드골 함. 프랑스 유일의 항공모함에 샤를 드골의 이름을 딴 이유는 그가 프랑스 인들에게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독일에 맞서 프랑스의 자유를 가져왔고 과거사까지 청산한 샤를 드골은 프랑스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는 인물로 남아있으며, 샤를 드골함은 그런 IS를 응징하기 위해 출동했다.

프랑스의 힘과 자유를 상징하는 샤를 드골. 그 이름을 가진 항공 모함이 앞으로 이런 참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테러의 뿌리를 뽑는 활약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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