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시선뉴스 이호기자] 태조 왕건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혜종과 정종 시대에는 왕권이 매우 불안정했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 할 때 호족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취했던 혼인정책의 부작용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시기에는 왕족들과 외척들이 왕위 계승을 위해 많은 다툼을 했다.

이런 어지러운 상황에서 즉위한 광종은 무엇보다 왕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했다. 때문에 여러 가지의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우선 주현공부법을 실시함으로써 각 주현 단위로 조세와 공물의 액수를 정해 징수했다. 이 정책은 중앙집권과 국가재정을 확보하는 기반이 된다.

또한 노비안검법(956년)을 실시하게 된다. 노비안검법은 호족들의 권력 확대 과정에서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를 양인으로 풀어주는 것을 골자로 한다. 노비를 해방함으로 인해 호족들의 경제적, 사군사적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었고 반면 노비들은 양민이 되어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으므로 국가의 재정 기반과 왕권이 안정되는 실로 일거양득의 정책이었다.

 

958년에는 광종은 중국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최초의 지공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 제도를 시행했다. 과거는 문예나 유교 경전의 능력을 시험하여 성적에 따라 관인을 등용하는 제도로 기존의 공신의 자제를 우선적으로 등용하던 관리 등용 제도를 억제하는 제도였다.

또한 과거 제도는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중시한 제도로서 무(武)신 대신에 문(文)신을 관리로 등용하여 왕권의 강화를 위한 새로운 관료 체제를 설정하는 기초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정치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무훈공신 세력을 약화시키는 대신, 군주에 대한 충성을 본분으로 하는 신진인사로 왕권의 안정을 도모했다.

그리고 왕권 중심으로 귀족층을 안정시키기고 지배층의 위계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공복을 제정했는데, 9품 관제를 실시하고 위로부터 자색, 단색, 비색, 녹색의 관등에 따른 4색 공복을 착용하게 하였다.

광종은 이런 개혁들을 성공시켜 왕권을 차근차근 강화시켰고 결국 공신과 호족의 세력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광종이 이 같은 개혁의 마무리이자 목표는 칭제 건원이었다. 광종은 고려를 제국으로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또한 광덕(光德)·준풍(峻豊)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고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西都)라 칭했다.

광종은 태조가 새로운 왕조를 세우기 위해 질렀던 여러 무리한 상황들을 개혁을 통해 모두 해결, 500년의 고려왕조를 이어갈 수 있도록 기반을 세운 왕이다. 왕권 강화를 위한 모든 개혁이 성공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광종은 본인의 카리스마도 엄청나지만, 유능한 신하 역시 알아보는 똑똑한 왕이었을 것이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