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극작가였던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투표용지가 배고픈 영혼을 달래주지는 못한다.”라고 말했다. 흔히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의 의미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는 선거를 통해 세상이 일변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오산임을 경험칙으로 잘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선거 이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바꿔 말해서 선거 과정에서 싹튼 정치 세력 간의 앙금을 치유하고, 우리 국민들 역시 일상 속에서 제 역할에 더욱 정진하는 아름다운 정치 문화와 시민정신이 싹틀 수 있다면 좋겠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대선은 팽팽한 접전이었기 때문에 선거 후유증이 만만치 않으리라 짐작된다. 승리한 쪽은 아슬아슬한 승리여서 더 짜릿한 쾌감을 맛볼 것이고, 반면에 패배한 쪽은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아쉬움과 분노감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그 몇 퍼센트의 차이가 승패를 좌우하고 현행 제도 아래에서는 이 방법 말고는 대통령을 뽑을 길이 없지만, 큰 차이든 작은 차이든 승자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원칙을 재확인해야 한다. 특히 승자는 겸허한 자세로 대선 이후의 행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명박 정권이 출범한 첫 해인 2008년에는 대대적인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가 있었다. 이때에 이명박 정권의 레임덕은 사실상 시작되었다. 그 시위에 빌미를 제공한 이명박 정권에게도 문제가 있었지만, 이를 기화로 정권 퇴진 운동이나 다름없었던 전면전을 정권의 임기 초반에 강행한 야권 진영에도 책임이 작지 않다. 그 이후에 드러난 사실관계를 따져볼 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와서 잘, 잘못을 따지자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대선에서 패배한 쪽의 집단적 상실감이 만만치 않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 중에서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는가에 따라 반대 진영의 대응 양상은 다소 다르게 나타날 수가 있겠지만, 그 어느 쪽의 승리든 5년 전 그 때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만큼 양 진영 사이의 갈등과 불신감은 극에 달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정책 노선이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서라기보다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전개 과정이 양 진영의 화해를 어렵게 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도 정치권이 그 갈등과 불신감을 더욱 부추기는 촉진 작용을 해 왔다는 점을 간과할 수가 없다.

   우리는 최근만 해도 대화와 타협의 정신으로 충만해 있어야 할 국회에서조차 최루탄이 터지고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을 생생히 목격한 바 있다. 날치기와 몸싸움이라는 대단히 후진적인 국회의 모습이 바로 대한민국 대의 정치와 정당 정치의 수준을 웅변해 주고 있다. 흔히 말하는 ‘상생의 정치’가 더 없이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이를 위해서는 권력구조와 선거구제 등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불가피하다. 이른바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라는 승자 독식의 게임 규칙을 개정할 때가 온 것이다.

   아무튼 이번 대선 이후 국론이 분열되지 않도록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중추 역할을 해야 한다. 특히 승리 진영은 승리에 도취해 있기에는 자신들이 걸머쥔 책임이 대단히 무겁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세계 자본주의 질서는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또 일본 자민당의 재집권으로 일본이 국수주의 혹은 군국주의라는 잘못된 방향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 역시 권력 교체기이다. 북한 김정은 정권도 취임 1주년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되는 한반도 정세인 셈이다.

   집권 세력은 우선 승자로서 갖기 쉬운 오만과 독선을 떨쳐야 한다. 역대 정권들의 사례를 상기할 때 마치 혁명군이 점령하듯이 국정을 농단하겠다는 자세는 금물이다. 의욕이 앞서다 보면 취임을 하기도 전에 실수가 노정될 수 있고, 이에 따라 정권의 신뢰는 처음부터 무너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따라서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국정 과제에 대해 차분히 점검하고 국민 여론을 수렴하는 방향으로 운영해야 한다. 새로운 대통령이 등장한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기존 제도 틀을 무리하게 바꾸는 일은 삼가야 한다.

   그렇다고 집권 세력이 선거 과정에서 유권자들에게 공약한 정책들을 망각하라는 취지는 아니다. 옥석(玉石)을 잘 가리고 타당성과 효율성의 원칙을 꼭 준수해 달라는 말이다.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 모두 무리한 공약들을 남발한 편인데, 그 공약들을 지킬 때는 국정에 무리가 따를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해당 유권자들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는 딜레마가 있다. 이런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당사자들에게 사과를 하고 양해를 구하는 일이 있더라도 공약이라고 해서 무리하게 지키려는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동안 역대 정권들이 입증해 왔듯이 새 정권은 ‘개혁’이란 말을 가장 선호하는 경향이다. 새로운 집권 세력에게 기존 체제나 시스템을 바꾸고자 하는 의욕이 무척 크다는 점을 방증한다. 그러나 5년이라는 시간은 길다고 짧다고도 볼 수 있지만, 레임덕을 감안할 때 실제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않다. 그래서 개혁 못지않게 소중한 덕목은 제도의 안정적 운영이다. 물론 대한민국은 전반적인 혁신이 필수불가결하다. 다만 그 혁신도 중장기적인 안목에서 차근차근 추진해야 성공하는 것이지 군사 작전하듯이 해서는 곤란하다.

   특히 정권의 당리당략에 따라 벌이는 개혁은 개악일 뿐이지 개선일 수가 없다. 19세기 이탈리아의 공화주의자였던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는 “개혁이 어떤 계급의 전유물이 되어 있는 한, 그것은 하나의 악을 다른 악으로 바꾸는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계급이든 집단이든 이런 개혁은 독선에 다름 아니다. 이로 인해 사회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국민의 저항에 직면하거나 정권이 바뀌면 그 개혁안은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다. 단기업적주의가 위험할 뿐만 아니라 무용지물인가를 잘 보여준다.

   차기 정권은 김영삼 정권의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및 옷 벗기기와 노무현 정권의 이른바 ‘4대 개혁 입법’, 이명박 정권의 4대강 강행을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그 세 가지 모두 어느 정도는 필요성이 있었지만, 처리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다. 반대 진영과 대화와 타협을 하고 국민 여론의 동향을 참작하는 방향으로 접근했다면 박수를 받을 수도 있었는데, 마치 혁명하듯이 해치우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목적이 아무리 옳더라도 과정이 민주적이지 못하면 실패하기 마련임을 우리는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반면에 야당 역시 ‘투쟁이 능사’인 양 처신하는 관행을 고쳐야 한다. 야당은 정부와 여당에 대해 견제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지만, 그 견제라는 기능도 헌법정신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야당(Opposition Party)이 ‘반대당’이라고 하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라는 뜻이 아니라 민의에 따라 반대할 일은 반대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때로는 국민적 명분이 있고 대화를 충분히 한 사안에 대해서도 당파성에 따라 무조건 반대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전투적 야당’이 곧 미덕인 듯이 오해하기 때문이다.

   다음 정권이 집권 세력의 맹동과 함께 경계해야 할 일은 관료주의이다. 앨빈 토플러(Albin Toffler)는 『권력이동』에서 “선거에서 아무리 여러 정당이 서로 경쟁하더라도, 그리고 어느 정당이 가장 많이 득표하는가와 상관없이 하나의 단일 정당이 항상 승리하고 있다는 것이 사태의 진상이다. 그것은 바로 관료 사회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정당’이다.”라고 했다. 관료 개개인들은 대체로 훌륭하지만, 부처이기주의 등 관료주의의 폐단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관료사회와의 거버넌스(governance)가 정권의 성패를 좌우할 공산이 높다.

   또 다른 맥락에서 놓쳐서는 안 될 대목은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정부 조직을 개편한다는 점이다. 시대 흐름이나 사회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정부 조직에 대해 어느 정도 손질해야 하지만, 5년마다 바뀌기 때문에 공직 사회의 안정을 이룰 수가 없고 정부 기능의 생산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차기 정권은 가급적이면 현행 정부 조직 체계를 지키기를 주문한다. 바꾸더라도 최소한에 그쳤으면 한다. 현행 정부 조직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정부 조직에 정답은 없다. 운영의 묘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이 더 바람직하다.

   우리 국민들도 새 정권에 과도한 기대를 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 지식정보 시대의 시민들은 단기간 내에 정부의 성과를 요구하는 편인데, 정부가 여기에 부담을 느끼게 되면 여러 가지 무리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 또 지금과 같은 권력의 다원화 시대에 대통령과 정부에게 책임을 지나치게 떠넘기는 관성은 시대착오적이다.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이라는 대통령의 헌법상의 지위에는 변함이 없지만, 어디까지나 대통령은 리더이자 최고 관리자일 뿐이다. 혁명가나 메시아를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언론도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일본의 유명한 기업인이었던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는 “계속되는 성공은 두려움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물론 실패하는 것 보다 성공하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다. 하지만 세 번 시도에서 세 번 모두 성공했을 때는 더욱 긴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모든 시도가 성공을 거두게 되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에 대해 과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대통령 당선자와 집권 세력이 명심해야 할 경구(警句)가 아닐 수 없다. 승리의 기쁨을 잠시 만끽하되 곧바로 무거운 책임감으로 어수선한 민심을 수습하는 일에 매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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