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공산당의 이론가였던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는 “위기란 과거의 것은 죽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는 그 시점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또 시장자유주의자인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은 “진정한 변화는 위기 상황에서만 나타난다.”라고 했다. 이 좌·우 논객들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위기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위기임에도 그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거나 위기 자체에 대한 인식조차 없다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대한민국의 향후 5년을 좌우할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불과 4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직감하고 있어야 한다. 물론, 위기라고 해서 우리나라가 백척간두 혹은 절체절명에 서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일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런 극한적인 상황으로 내몰릴 수도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앞에서 두 이론가의 말을 인용한 까닭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도 관심사이지만, 위기 상황을 분명히 깨닫고 그 타개를 위해 노력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막중하다고 하겠다.

  

 
   필자는 대한민국의 당면 위기를 ‘체제의 위기’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미 안철수 전 후보가 ‘낡은 정치 체제’를 거론한 바 있지만, 필자가 말하는 위기의 본질은 정치 체제를 넘어서는 것이다. 건국 이후 지금까지의 대한민국 역사는 파란만장 속에서도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한강의 기적’ 바로 그것이었다. 그 기적의 역사에 공짜는 없는 법인지 후유증 혹은 위기의 징후가 나타난 지 이미 오래이다. 그 시발점은 1997년의 외환 위기였다. 이것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서 욱일승천하던 대한민국에 닥친 본격적인 위기의 신호탄이었다.

   그 이후 15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이 15년 동안에 세계는 빠르게 변해 왔고, 15년 전과는 많이 다른 시대적 환경을 맞이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이 아니면 급변하는 시대에 적응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 패러다임이 아직 안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체제 위기의 지속을 운운할 수 있다. 새 패러다임은 우리나라가 전반적으로 보다 공정하고 개방적이며 창의적인 정신과 게임규칙을 내포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글로벌 시대와 지식정보 시대, 그리고 녹색 시대라는 트렌드에 상응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자주 인용하는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의 ‘국가가 멸망할 때 나타나는 징조’를 다시 꺼낼 수밖에 없다. ① 원칙 없는 정치 ② 노동 없는 부(富) ③ 양심 없는 쾌락 ④ 인격 없는 교육 ⑤ 도덕 없는 경제 ⑥ 인간성 없는 과학 ⑦ 희생 없는 신앙이 그것이다. 수십 년 전 인도 국민들을 향한 간디의 가르침이었지만, 공교롭게도 오늘날 대한민국에 잘 들어맞는 충고가 아닐 수 없다. 요컨대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앞서 달리기는커녕 ‘과거의 덫’에 갇혀 있어 이중적 과제에 직면해 있는 셈이다.

   금년에 발생한 정치인들과 공직자들 그리고 기업인들의 각종 비리만으로도 우리는 대한민국 기득권의 실상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깨닫고 있다. 물론, 불법적이거나 부도덕한 행위는 일부에 국한된 현상이라고 자위하기가 용이하겠지만, 문제는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하듯이 잘못된 풍조가 사회 분위기를 지배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지금은 투명성 혹은 윤리성과 신뢰 자본이 중시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국가든 기업이든 정경유착을 비롯한 불법과 편법의 낡은 관행을 청산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정치만 놓고 보면, 모든 정치 세력이 무능할 뿐만 아니라 부도덕하기까지 하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우리 국민들은 절망하고 있다. 새누리당의 공천 헌금 의혹 사건, 민주당의 공천 및 경선 비리 사건, 통합진보당의 공천 비리와 폭력 사건 등 올해에만 터져 나온 불미스러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수와 진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마찬가지다. 보수든 진보든 자신만은 문제가 없다는 듯이 위장하고 있지만, 모두가 낡고 부패한 세력이라고 규정당해도 할 말이 없게 되어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아무리 급진적인 혁명가라도 혁명 바로 다음 날이면 보수적이 된다.”라고 했다. 또 프랑스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Felix Gattari)는 “집권하면 그 자체가 우파이며, 이 세상에 좌파 정부란 없다.”라고 했다.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정치 집단조차도 권력의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권력을 잡는 그 순간 기득권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역사에서도 이를 경험해 왔다. 따라서 어떤 권력을 선택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존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이다.

   그렇다. 대통령 권력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기 십상이다. 더욱이 우리나라 집권 세력들은 집권을 곧 혁명으로 착각하여 임기 내에 모든 것을 다 뒤집어 놓을 듯이 행세해 왔다. 따지고 보면, 대통령 권력은 지금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대통령이나 정부가 모든 분야를 조종하는 시대도 아니거니와, 당선자라고 해도 기껏해야 절반의 지지를 받았을 뿐이다. 여론을 두루 청취해야 한다는 취지이다. 그런데 현실은 대통령과 몇몇 참모들이 자신들의 짧은 생각과 의욕만으로 국정을 농단하려는 경향이 크다. 거기다 준비가 부족한데도 말이다.

   나아가 정당들의 잦은 명멸(明滅)과 신장개업, 그리고 정치인들의 무분별한 이합집산 역시 낡은 정치 체제의 자화상으로서 반드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통 사람들은 단골 식당을 옮길 때도 신중을 기하는데, 하물며 이념 혹은 신념을 함께 해 온 정당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라이벌 정당에 몸을 담는 행위가 다반사로 이루어지는 우리 정치 현실을 누가 정상이라고 하겠는가! 일반 당원들의 무원칙한 당적 이동도 비난받아 마땅한데, 특정 정당 소속으로 국회의원까지 지낸 사람들이 철새처럼 왔다 갔다 하는 걸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새누리당에서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 곁으로 옮겨간 김덕룡, 김정수, 문정수, 강삼재, 윤여준 전 의원 등은 당의 요직을 두루 거친 사람들이다. 또 민주당에서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 쪽으로 말을 갈아 탄 한광옥, 한화갑 전 의원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겉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실상은 구차하기 이를 데 없다. 자신을 키워준 정당에 대한 배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러니 어느 국민이 정당을 지지하고 정당 정치를 신뢰하겠는가! 이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면 된다.’는 가르침밖에 더 되겠는가?

   아무리 선거 국면이라지만 이런 부도덕한 정치인들을 받아들이는 새누리당과 민주당, 그리고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도 문제다. 이런 정치인들이 들어오면 그 정당의 외연이 넓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오염이 더 심해질 뿐이다. 구태의연한 정당과 후보들의 행태에 신물이 나는데 누가 투표를 하고 싶겠는가! 하나의 정당이라도 기존의 잘못된 관행으로부터 탈피해야 유권자들의 선택지가 생길 터인데, 언필칭 진보와 개혁을 표방하는 정당도 초록동색이니, 그저 어안이 벙벙하다. 이 정당들이 정치 개혁을 외쳐본들 누가 믿겠는가!

   물론, 당적 이동 모두를 비난할 수는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불가피하거나 정당한 사례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납득할 만한 명분과 계기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정치 신념이 그 정당의 정책 노선과 배치되거나 자신의 소속 정당이 엄청난 국민적 배신행위를 했을 때 탈당한다든지, 또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내걸고 신당을 만드는 경우는 어느 정도 용인할 수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은 앞서 예시한 정치인들처럼 그 명분이 궁색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배신 정치를 일삼는 정치인과 정당들이 국민의 신뢰를 어떻게 얻겠는가!

   앞으로 4일 뒤에 제18대 대통령이 정해진다. 그런데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든 앞의 이유들 때문에 다음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리라 믿는 국민은 많지 않다. 다만, 다음 대통령부터는 대통령 권력에 대해 국민들이 대통령더러 마음대로 하라고 부여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아니라, 국민의 뜻을 받들어 헌법과 법률의 바탕 위에서 소임을 다하라는 제한된 대리 권력임을 명심하기를 바란다. 국민들 역시 대통령에 대해 지나친 기대와 요구를 하기보다는 대통령이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주권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 도리이다.

   궁극적으로는 제18대 대통령까지는 새로운 체제를 향한 과도기로 간주하고, 5년 후에는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훌륭한 대통령이 나올 수 있도록 체제 혁신을 위해 힘과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그 요체는 정당 혁신이다. 정당이 체제 위기의 가장 큰 주범일 뿐만 아니라, 정당 정치가 체제 혁신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당 혁신의 지름길은 새로운 정당의 건설이다. 그람시의 말대로 과거의 것은 죽어가고 있고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면, 그 새로운 무엇을 만들 당위성이 너무나 분명하다.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Thomas Mann)은 “정치를 혐오하는 국민은 혐오스러운 정치를 가질 자격밖에 없다.”라고 일갈했다. 정당 정치가 불신의 극을 향해 치닫고 있다 하더라도 정치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 또 지식정보 시대에 국민의 참여가 늘어난다고 해서 대의 민주주의를 대체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대의 정치의 근간인 정당 정치를 되살리는 일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 정당들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대안 정당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번 대선 이후에 이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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