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 6월 25일 오늘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날로 국가기념일이다. 한반도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된 민족의 매우 슬프고 아픈 기억이 있는 6.25 한국전쟁. 어떤 전쟁이었을까.

한국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일본의 불법 점령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1943년 12월 카이로선언에서 독립을 약속 받았고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에서 이를 재확인했다. 그러나 ‘적당한 시기에’ 독립을 이룩한다는 조건부가 붙은 상태였다.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난 한반도에 대해 미국와 소련은 아직 한반도가 제대로 된 국가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38선을 기점으로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5년간 신탁 통치를 한다고 결정한 것이다. 이에 한반도 국민들은 그간 일본에 점령당한 것이 괴로웠기 때문에 다른 국가에 통치를 받는 것을 맹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김일성을 위시한 좌파세력이 소련의 지령으로 찬탁으로 돌아섬으로써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러워졌다.

한반도의 반탁운동이 거세지자 미국과 소련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했으나 아무 해결책도 강구하지 못한 채 결렬되었고, 이에 미국은 소련의 반대를 무시하고 유엔에 이 문제를 제기했다.

 

유엔의 주도 하에 남한은 총선거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고(1948.8.15.), 북한은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의 주도 하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게 되었다(1948.9.9.).

정부수립을 마친 북한은 한반도의 적화 통일을 위해 미소 양국의 군대의 철수를 요청하면서 계획적으로 군사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소련이 먼저 군사를 철수시키자 미군도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을 남긴 채 철수하게 된다.

그리고 북한은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군사력을 끌어올려 13만의 군사와 10만의 예비군을 조직할 수 있었고 전차 등의 중화기 등의 장비 역시 갖출 수 있었다. 반면 남한은 정치, 경제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상대적으로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출 수 없었고 육군, 해군, 공군의 창설로 10만의 병력을 갖추긴 했지만 8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38선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공산당 게릴라를 척결하는 군사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모두가 잠든 틈을 타 북한은 38선을 뚫고 기습적으로 남침(남한으로 침략)한 것이다.

개전일 3일 만인 28일, 수도인 서울이 함락되어 북한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낙동강까지 파죽지세로 남하한 북한군은 남한영토의 90%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과 한국군의 총 반격으로 전세를 되돌리고 9월 28일, 수도인 서울을 다시 수복할 수 있었다.

전세가 바뀐 남한과 유엔군은 10월 1일 남한이 38선 돌파하여 북으로 진격하게 되었고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하게 되어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상황까지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때 압록강까지 하릴 없이 밀리던 북한의 김일성은 중공군에게 대표단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했다. 유엔과 미국이 한반도를 거슬러 중국까지 올 것에 심기가 불편하고 동북삼성이 소련의 지배하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중공은 이를 수락하여 국군, 미군,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할 무렵 출병을 시작했다. (미국은 중공군이 대만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한국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가 큰 코를 다치게 된다)

26만 명이나 되는 중공군의 인해 전술에 1951년 1월 4일 유엔과 미군, 한국군은 서울을 포기하게 되는 1.4후퇴를 하게 된다. 하지만 남한군과 미군은 우월한 무기로 3월 5일 서울을 재탈환 하는데 성공했고 4월 11일, 북진을 계속 주장하는 맥아더는 제한 전쟁을 하려 하는 미국 정부의 의견과 맞지 않아 해임된다.

그 후 1951년 3월, 38 도선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어 전쟁 1년 만에 전선은 다시 최초의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전쟁 당사자인 남한과 북한은 물론 미군이나 중공군의 피해도 막심했기 때문에 휴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2년이라는 시간동안 휴전 회담은 지겹기 짝이 없을 정도로 이어졌다. (휴전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영화 고지전이 그 내용을 다뤘다).

1953년 7월 27일 비로소 휴전 협정은 맺어졌고, 치열한 전투를 하던 38도선은 그대로 휴전선이 되어 버렸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총 사망자는 300만이 넘었고 이산가족은 1천 만 명 이상이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전쟁고아가 생겼으며 쑥대밭이 되어 돌만 남은 남한을 보고 전 세계 사람들은 구석기 시대로 돌아갔다며 안타까워했다. 3년간 치러진 전쟁은 그야말로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는지 모를 정도로 상처만 남긴 채 끝도 나지 않은 채 휴전이 되어 버린 것이다.

휴전은 종전이 아니기에 우리의 주적은 아직도 북한으로 되어 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국.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이 슬픈 상황은 언제쯤 끝날 수 있을지 안타까울 뿐이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