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다산 정약용은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면서 발명가, 건축가로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을 주장한 인물이다.

▲ ⓒ지식교양 전문채널-시선뉴스

다산은 어렸을 적 아버지로부터 기초적인 학문을 배웠으며 4세에 천자문을 읽혔고 7세에는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멀고 가까움이 달라서라네" 라는 시를 썼다. 10세에는 이 전에 썼던 자작시들을 모아 삼미자집까지 편찬했다고 한다.

일찍이 장가를 들고 서울 생활을 시작했으며 22세에 진시과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글짓기 시험 등에서 항상 수석을 차지하면서 정조의 눈에 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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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와 거중기를 이용해 수원 화성을 건설하면서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고 경기도의 암행어사가 되어 탐관오리들을 잡아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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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신유박해 때 모함에 빠져 모진 고문을 받고 18년의 긴 유배생활을 강진에서 시작하게 된다. 유배생활을 하면서 저술들을 많이 지어 세상 사람들에게 읽히려고 노력했다.

그 중 유명한 목민심서는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책으로 각 편은 6조로 나뉘어 72조로 편제 되어있고 48권 16책으로 되어있다.

또 흠흠신서는 형사사건을 다루는 관리들의 자세에 관해 적혀있는 것으로 조선과 청나라의 역대 모범적인 판례를 선별해 해설과 비평을 담고 살인사건 심리의 실무 지침서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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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18년의 긴 유배생활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하게 된다. 긴 유배생활에도 좌절하지 않고 부국강병을 이루려 노력했던 다산 정약용. 높은 자리에서도 백성의 편에서 생각하려 했기 때문에 그의 업적이 더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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