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우리 모두는 진흙탕에서 허우적대지. 하지만 이 가운데 몇몇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본다네.”라고 읊었다. 또 영국 출신의 추리소설가 아가사 크리시티(Agatha Christie)는 “사람은 오래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속에서 중요했던 순간들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그때는 너무 늦다.”라고 일갈했다. 안철수 후보(편의상 이렇게 쓰겠다!)의 사퇴를 보면서 느끼게 되는 단상(斷想)들이다.

   안철수 후보의 도중하차에 대해서는 여러 차원에서 얘기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안 후보의 이상주의(理想主義)에 그 원인이 있지 않았을까? 이상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상에 버금가는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부족했기 때문에 ‘안철수 현상’이라는 열풍에도 불구하고 안 후보가 어려움에 빠지지 않았을까? 적어도 이상 70, 현실 30 정도의 분포였다면 오늘의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안철수 후보는 순수하고 진지했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현실 정치 세계는 순수성과 진지성만으로는 통용되기가 어렵다. 국민의 가슴 속에 안 후보에 대한 좋은 기억이 오래 남을 수는 있겠지만, 자웅(雌雄)을 겨루는 승부의 세계에서는 순수성과 진지성 외의 뚝심과 전략·전술 같은 다른 무기들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무기를 갖추기에는 시간도 짧았고, 안 후보의 순수한 마인드 자체가 새로운 무기 개발에 걸림돌이 된 셈이다.

   이런 안철수 후보의 특성을 ‘아마추어리즘’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순수하고 열정으로 가득 차 있지만, 프로에 비해 현실 역량이 떨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안 후보는 기존 정치권이 프로페셔널리즘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낡은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안 후보의 순수성과 열정은 소중한 자산이지만, 여기에 프로페셔널리즘을 어느 정도 장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취지이다.

   안철수 후보는 야권 단일 후보의 등극이라는 당면 목표에는 실패했지만, 언론과 국민 여론은 안 후보의 ‘입’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안 후보의 선택 여하에 이번 대선 판도가 달려 있는 것이다. 비록 유종의 미(美)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야권 후보 단일화 경쟁에 참여한 이상, 안 후보의 선택지는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다.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문재인 후보를 돕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더욱이 원칙을 강조하는 안 후보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후보 단일화의 약효가 어느 정도 반영될지는 쉽게 장담할 수 없겠지만, 오차 범위 내 접전을 벌이고 있는 문재인 후보 혹은 야권 진영으로서는 안철수 후보의 지지를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을 의식하고 있을 안 후보는 자신 때문에 정권 교체의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결과를 결코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안 후보의 지지 강도는 문 후보 쪽의 태도에 달려 있다. 문 후보의 정치력이 시험대에 올라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별개로 안철수 후보가 이번 대선 이후에 어떤 길을 걸을 것인지도 초미의 관심사이다. 안 후보의 선택지는 크게 ① 민주당과의 공조 ② 신당 창당을 통한 독자 노선 추진 ③ 정계 은퇴이다. 선택의 귀결은 안 후보의 의중에 상당히 달려 있겠지만, 이번 대선 결과 역시 그 선택을 제약할 가능성이 높다. 만일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①번과 ②번 중에서 고를 것이다. 이와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면 ②번과 ③번 사이에서 고민할 법하다.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민주당과의 공조이다. 문재인 후보가 당선될 경우에는 공동 정부에 참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안철수 후보의 지지가 문 후보의 당선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는 분위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문 후보로서는 안 후보의 국정 참여를 간절히 원할 전망이다. 문 후보로서는 정권의 기반을 조기에 안정적으로 다져야 하는데, 여기에 안 후보의 역할이 있다고 볼 것이다.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면 민주당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민주당이 먼저 와해되는 시나리오가 유력하다. 석패든 참패든 안철수 후보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문 후보가 실패한다면 안 후보의 거취와 무관하게 민주당은 공중 분해될 가능성이 높다. 이를 수습하는 데도 안 후보의 존재감이 필요하다. 하기에 따라서는 안 후보가 주도권을 쥘 수도 있다. 연부역강하고 국민적 이미지도 좋은 편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안철수 후보와 민주당의 비주류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는 새로운 개혁 정당이 태동할 여지가 다분히 있다. 이것은 두 번째의 선택인 신당 창당을 통한 독자 노선 추진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물론, 문재인 후보가 승리하더라도 안 후보는 신당 창당을 추진할 수도 있다. 문 후보와의 공조가 언제까지 지속되리라는 보장이 없고,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서 자신의 정치적 생명은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선택지인 정계 은퇴는 최악의 경우로서 현재로서는 상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번 대선 결과와 관계없이 현실 정치 자체에 대해 환멸을 느낄 때에는 안 후보의 성품을 보건대 과감하게 은퇴 선언을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안철수 현상’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적인 기대감은 여전하고, 이에 대한 책임감을 상당히 느끼고 있는 안 후보이기 때문에 은퇴에는 신중을 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정당 정치의 발전을 위해서는 안철수 후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필자가 누차 강조해 온 대로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 중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낡은 체제의 지속을 의미할 뿐이므로 이 시대착오적인 독과점구조를 깨는 새로운 개혁 정당이 반드시 들어서야 한다. 따라서 안철수 후보가 신당 창당을 통해 독자 노선을 추진하는 방향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번 대선에서 패배한 쪽은 존재감을 거의 상실할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경우든 안철수 후보의 입지는 대단히 넓어질 수밖에 없다. 이긴 쪽 역시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안 후보의 독자 노선은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신당에는 새누리당이나 민주당 인사들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그 주도권은 철저히 안 후보가 행사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안철수 후보가 주도권을 행사한다고 해서 과거의 3김 씨처럼 사당(私黨)화하라는 말은 아니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이 강하고 이에 알맞은 리더십을 갖춘 인사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맺을 때만이 새로운 개혁 정당은 성공할 수 있다. 처음부터 원내의석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참신하고 유능한 인재들의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비유컨대, 안 후보는 정권 교체의 불쏘시개가 아니라 정치 혁신의 불쏘시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안철수 후보는 사퇴 회견에서 “비록 새 정치의 꿈은 잠시 미뤄지겠지만 시대와 역사의 소명은 결코 잊지 않겠다.”라고 했다. 어떤 식으로든 안 후보 식의 정치를 계속 하겠다는 다짐으로 받아들여진다. 안 후보 스스로 자신에게 쏠린 국민적 기대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안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 기존 정치 체제에 휘둘리기보다는 이 땅의 잘못된 정치 풍토를 개선하고 새로운 대안 세력을 구축하는 역할을 하기를 염원하는 유권자들도 적지 않다.

   안철수 후보가 중심을 이루는 신당은 ① 디지털 정당 ② 참여 정당 ③ 전국 정당 ④ 정책 정당 등 참 진보·개혁 정당 노선을 추구해야 한다. 참 진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기존의 낡은 진보와는 차별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이런 이상(?)이 실현되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부터 설계를 잘 하고 좋은 인재들이 참여한다면 그 꿈은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5년 후에는 집권을 의도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프란시스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F. Fitzgerald)는 “굴하지 않고 견뎌내는 힘뿐만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힘도 중요한 에너지이다.”라고 했다. 또 19세기 러시아 시인 니콜라이 알렉셰비치 네크라소프(Nikolay Alekseyevich Nekrasov)는 “조국이 어려울 때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진정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라고 말했다. 안철수 후보가 당면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정치 혁신의 대장정을 향해 힘찬 진군을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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