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정치로부터의 교훈

   파블로 피카소(Pablo R. Picasso)는 “성공은 위험하다. 성공과 함께 다른 사람을 모방하기보다 자기 모방이 시작된다. 그리고 마침내 불모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라고 말했다. 영원한 승자가 없는 이유는 승자일수록 변화를 기피하거나 성공 신화에 깊이 빠져들기 때문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끊임없이 신진대사를 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실패할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일본은 다가오는 12월 16일에 중의원 총선거를 실시할 예정이다. 2009년 8월, 절반을 훨씬 넘는 압도적인 의석을 차지함으로써 처음으로 집권에 성공했던 민주당이 여러 가지 내우외환에 시달리자 전격적으로 총선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는 오랜 집권당이었던 자민당의 과반 의석 확보가 유력하게 점쳐지고 있다. 그 구태의연하기 짝이 없던 자민당 시대로의 회귀라니! 

   의원내각제 국가인 일본에서 국회 해산과 총선 실시는 늘 되풀이되는 일이지만, 이번의 경우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3년 전 총선에서 일본 국민들이 민주당에 열렬히 지지를 보냈던 것은 ‘자민당 장기 집권’으로 상징되는 낡은 일본 정치를 혁신해 달라는 염원 때문이었다. 요컨대 타 분야에 비해 유독 지체되어 있던 정치의 탈바꿈 없이는 지리멸렬한 국면을 돌파하기 어렵다는 국민적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민주당은 그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민주당 역시 계파 싸움, 정경유착, 관료집단에의 과잉 의존 등 자민당의 폐단을 그대로 노출했다. 한마디로 무능하고 부도덕한 집권 세력으로 낙인찍히면서 낡은 정치의 표본인 자민당에 정권을 내줄 운명에 처해 있다. 대내외 환경의 악화도 민주당 정권의 도중하차에 기여했지만, 이 역시 민주당의 위기관리 능력의 실패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자민당의 재집권은 우경화 노선의 복귀를 의미하며, 따라서 대한민국에 좋은 신호일 리는 만무하다. 일본 국민들의 입장에서도 결코 달가울 수 없는 고육지책일 따름이다. 더 이상의 악화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자민당의 재집권은 당분간 일본 정치에 희망이 자리하기가 어려움을 말해준다. 그럴수록 국수주의(國粹主義)를 추구하는 일본유신회 등의 극우 정당이 점점 득세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은 지금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처럼 하루아침에 급전직하하지는 않겠지만, 국운이 쇠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정치 리더십의 실패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대안으로 떠올랐던 민주당마저 실패로 끝났으니 일본 정치의 동맥경화증이 여간 심각하지 않음을 충분히 직감할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일본 정치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물론, 일본과 우리나라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일본 정치와 대한민국의 정치 또한 그렇다. 대한민국은 일본보다는 역동적이고, 시대 흐름에 민감한 편이다. 한류 열풍에서 보듯이 우리 국민들의 에너지는 남다른 데가 있다. 이것이 정치를 바꾸는 데도 순기능을 할 수가 있다. 적어도 집권 세력에 대한 심판이란 점에서는 우리가 일본보다 더 낫다. 

   ‘안철수 현상’의 출현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대한민국의 제도 정치의 극단적 악화가 불러들인 것이지만, 우리 국민의 혁신 의지가 집적되지 않았다면 ‘안철수 현상’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안철수 현상’의 실패 우려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우리나라도 정치 혁신이 결코 쉽지 않음을 절감하게 되는 요즘이다. 안 후보의 승패를 떠나 ‘안철수 현상’은 한때의 열풍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다분히 보인다. 

   그만큼 기득권 세력의 지배력이 대단히 공고하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기득권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 정당들에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다. 기업과 언론과 시민사회 또한 양당과의 유착관계가 깊은 반면에, 새로운 정치 세력에 대해서는 배격하는 경향이 크다. 말하자면 우리 사회의 지배구조가 양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취지이다. 따라서 가히 혁명적인 운동이 아니면 이 장벽을 무너뜨리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안철수 현상은 여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1년 전에 불기 시작한 안철수 바람을 태풍으로 승화할 만한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한 탓이다. 정당 수준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유의미한 정치 세력을 형성하는 일이 필수 불가결했는데도, 마치 장렬히 전사하겠다는 각오였는지 단기필마에 만족하고 말았다. 용기는 가상했으나 현실의 조건을 간과한 백면서생의 치기(稚氣)라고 비하할 만하다.

   혹자는 말한다. 대한민국은 시스템이 잘 구비되어 있어서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필자는 이런 견해에 반대한다. 그렇다면 청와대와 관료집단과 기업과 시민사회만 있으면 되지 굳이 국회가 있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 얼마나 반(反)국민적이고 반(反)민주주의적인 발상인가. 아무리 국회와 정당의 수준이 낮다 하더라도 국회와 정당이 아니고서는 대의 정치를 수행할 수가 없음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그렇다면 정당을 혁신하고 이를 통해 국회를 선진화하는 일이 선결 과제인데, 기득권 정당들의 자기 개혁을 기대하기가 어렵다고 할 때, 남는 것은 21세기의 시대정신에 맞는 새로운 정당을 건설하는 일이다. 이 과업을 아무나 할 수는 없다. 때마침 안철수 후보가 그 역할을 부여받았는데, 안 후보는 스스로 ‘안철수 현상’의 본질을 잊고 있다. 험난하지만 의미심장한 ‘새로운 길’을 마다하고 상처투성이인 ‘낡은 길’을 편안히 달리려 하고 있다.

   안철수 후보가 야권 후보 단일화라는 미명 아래 낡은 체제와 손을 잡고 있는 현주소는 바꿔 말해 안 후보 스스로 ‘안철수 현상’에 대한 배신행위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거듭 지적하지만, 안 후보가 ‘안철수 현상’이라는 사다리를 걷어참으로써 정치 혁신이라는 목표물은 어느덧 허물어지고 있다. 이런 형국에서 안 후보가 아무리 그럴듯한 정치 혁신안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메아리 없는 독백’일 수밖에 없다.
 

   안철수 후보는 어제(19일) 있었던 모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기업 경영과 정치는 많이 다른 것 같다,”라고 했다. 정치 입문 이후 겪은 신고(辛苦)가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말인데, 그 중에서도 최근에 일어난 문재인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받은 상처가 적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그 스스로 낡은 체제라고 묘사한 기존 정치권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안철수 후보와 민주당은 한배를 타기에는 부적절하다. 공유할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행태의 측면에서는 현격히 다르다. 민주당과 새누리당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어 안정감이 있는지는 몰라도, 배타적이고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안 후보와 같은 선비가 몸을 담을 만한 그릇이 아니다. 그 정당들 소속의 훌륭한 정치인들도 적지 않지만, 집단적인 환경과 풍토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안철수 현상’이 실종될 위기에 처해 있고, 안 후보의 거취 또한 대단히 불투명함으로써 금년 대선은 역대 대선과 마찬가지로 기존 정당 후보들 간의 시시한 싸움이 될 공산이 크다. 한마디로 ‘과거 대(對) 과거의 힘겨루기’ 양상을 띠는 마이너리그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는’ 이번 대선에 참여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깊어지는 유권자들이 많아질 것 같다. 치열함은 더하겠지만, 이를 참여의 열기라고 할 수 있을까?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역사가 되풀이되고 예상치 못한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면 인간은 얼마나 경험에서 배울 줄 모르는 존재인가.”라고 일갈했다. 일본 정치의 실패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낡은 정치 질서를 바꾸지 못해 선진국의 대열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높은 일본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도 우리는 그 어떤 교훈조차 얻지 못한다면 우리나라 역시 후진국으로 전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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